한라산 존자암지
서귀포시 하원동 산1-1번지 불래오름 남서능선 1300m 지점 계곡 남동향에 자리한 사찰이다. 홍유순의 '소총유고'에 의하면 '존자암은 삼성이 처음 일어날 때부터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충암 김정의 '존자암중수기'에서도 이 사실을 인용하고 있다. 이곳 존자암에서는 나라의 국운융창과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국성재도 봉안되었다. 오래도록 폐사로 남아있다가 1998년부터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2005년 대웅전, 국성재각 등이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실주차장에서 존자암까지는 20여분 남짓 걸리지만 눈이 쌓인 날에는 각별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 아이젠은 필수이다.
곳곳에는 겨우살이. 새들이 똥을 싼 자리마다 겨우살이들이 기생하여 붉은 열매를 맺었다.
일주문
모노레일
산신할아버지도 무척 춥겠는데 다행히 물은 얼지 않고 졸졸 흘러주었다.
이 안내문에는 불래오름 남쪽 기슭 해발 1200m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준을 정하고 1300m인지, 1200m인지 정확히 해 줄 필요가 있다.
대웅보전
석가여래
눈매가 아름답다.
국성재각
국성지위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봉안하고 있다.
존자암지 세존사리탑
제주도 현무암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1993년 1차 조사 당시 발굴된 사리탑이다. 이 사리탑이 처음 발견된 곳은 이곳이 아니라 존자암에서 한참 내려간 계곡이었다.
『증보탐라지, 일본천리대소장본, 영조 년간』 제주목 【佛宇】조에는 이 사리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보】불상 1구와 함께 섬돌과 기와조각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 옆에 석옹石瓮이 있는데 뚜껑을 흔들고 움직여 열어보고자 해도 열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 옆에서 시끄럽게 하면 조각구름이 항아리 틈에서 일어나 잠깐 사이에 무수한 산봉우리를모두 뒤덮고 구름을 일으켜 비를 내리게 하는데 縣 사람들이 유람객에 의한 폐해가 고통스러워 연못 속에 밀어넣었다고 한다.
연못 속에 밀어넣었던 사리탑이 저 아래 계곡에 파묻힌 채 드러났던 것일까. 당시의 사정이 참으로 궁금하다.
「김치유산기 金緻遊山記,김치(1609)」에 의하면 김치는 이곳 불래오름 존자암에서 수정스님을 만나고 다시 옛적의 최초 존자암 터를 찾아간다. 이곳 존자암은 최초의 영곡 존자암에서 어느 시기에 옮겨온 곳이다. 김치가 삼장골에서 불래오름으로 올 때에는 이 사리탑의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을 것이다. 물론 그 길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추적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리고 나서 영실 계곡 깊은 곳의 최초 존자암지로 향했을 것으로 본다. 영실옥좌가 최초 존자암지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보다 더 심중이 가는 곳이 있다. 세계문화유산본부의 허락을 득해야 하는 터라 쉽게 탐방하지 못하는 것이 원통할 따름이다.
김치(1609)의 글을 새겨보자.
노루오름[獐岳]을 넘어 삼장골[三長洞]로 들어갔고 삼장골을 거쳐 불래오름[浦涯嶽]을 넘었다. 이리구불 저리구불 돌면서 남쪽을 향하여 가서 한 정사(精舍)에 도착하였다. 높은 곳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아래로는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는 그런 곳이었는데 바로 존자암이었다.
널판으로 지은 집 8~9칸을 모두 띠로 덮었는데 사치스럽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았다. 한 스님[胡僧]이 문밖에 나와 절을 하고 우리를 선방으로 맞아들였다. 이름을 물으니 수정(修淨)이라 하였다.
(중략)
빽빽한 밀림을 지나고 깊은 숲을 뚫고 점점 멋있는 경지로 들어갔다. 6~7리를 가자 영실 아래에 도착했다. 골짜기[洞府]는 자못 넉넉하고 넓었다. 이 또한 옛적의 존자암 터였다. 천길 낭떠러지 푸른 절벽이 병풍처럼 둥글게 에워싸 있었다. 그 위쪽으로는 괴이한 바윗돌들이 마치 나한의 형상과 같은데 오백이 넘어보였다. 아래로는 샘이 흐르는데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듣기에 거문고와 비파소리 같았다.
임제가 보고 이익태도 보고 김상헌과 김치도 보았는데 지금에 이르러 최초의 존자암지를 확인한 이가 누구인가.
저 새도 그곳에서 날아왔는데 나는 또 언제 그곳으로 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