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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구름 그리고 섬

고사리 평원길

by 산드륵 2024.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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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오래 보자, 친구야

 

 

관음사 계곡길에서 고사리 평원길을 거쳐 삼의악 입구로 빠져나오는 숲길. 2시간 30여분에 걸친 이 길에는 아름답다기보다는 그 아름다움마저 벗어버린 정제된 품격이 있다. 고요하면서도 맑은 생동감이 이 숲의 품격을 더한다.

 

 

관음사 역사문화탐방길에서 계곡을 두번 건너 삼의악 방향으로 스며들면 드넓은 고사리평원을 만날 수 있는데 그곳을 지나 산록북로 또는 516로로 빠져나오던지, 내친 김에 삼의악 정상으로 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평원길에는 아라동공동묘지로 이어진 길 등등 동서남북으로 여러 길이 나 있기 때문에 자칫 방향을 잘못 잡으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길이 너무 많으면 길이 아니다. 미로다.

 

 

관음사 계곡 어디쯤에서 삼의악 방향으로 길을 걷는다. 길은 운명처럼 만난다.

 

 

사람이 걷기에 좋은 길.

 

 

그 길을 멧돼지도 걸어갔다.

 

 

길/신경림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든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살고 싶은 땅에 가서/신경림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

돌아가길 단념하고 낯선 길 처마 밑에 쪼그려 앉자

들리는 말 뜻 몰라 얼마나 자유스러우냐

지나는 행인에게 두 손 벌려 구걸도 하고

동전 몇닢 떨어질 검은 손바닥

 

그 손바닥에 그어진 굵은 손금

그 뜻을 모른들 무슨 소용이랴

 

 

눈/신경림

 

내 몸이 이 세상에 머물기를 끝내는 날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나갈 테다

나를 가두고 있던 내 몸으로부터

어둡고 갑갑한 감옥으로부터

 

나무에 붙어 잎이 되고

가지에 매달려 꽃이 되었다가

땅속으로 스며 물이 되고 공중에 솟아 바람이 될테다

새가 되어 큰곰자리 전갈자리까지 날아 올랐다가

허공에서 하얗게 은가루로 흩날릴 테다

 

나는 서러워하지 않을 테다 이 세상에서 내가 꾼 꿈이

지상에서 한갓 눈물자국으로 남는다 해도

이윽고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때 가서 다 잊는다 해도

 

 

빛/신경림

 

쓰러질 것은 쓰러져야 한다

무너질 것은 무너지고 뽑힐 것은 뽑혀야 한다

그리하여 빈 들판을 어둠만이 덮을 때

몇 날이고 몇 밤이고 죽음만이 머무를 때

비로소 보게 되리라 들판 끝을 붉게 물들이는 빛을

절망의 끝에서 불끈 솟는 높고 큰 힘을

 

 

싹/신경림

 

어둠을 어둠인지 모르고 살아온 사람은 모른다

아픔도 없이 겨울을 보낸 사람은 모른다

작은 빛줄기만 보여도 우리들

이렇게 재재발 거리며 달려나가는 까닭을

눈이 부셔 비틀대면서도 진종일

서로 안고 간질이며 낄낄대는 까닭을

 

그러다가도 문득 생각나면

깊이 숨을 소중하고도 은밀한 상처를 꺼내어

가만히 햇빛에 내어 말리는 까닭을

뜨거운 눈물로 어루만지던 까닭을

 

 

쓰러지진 것들을 위하여/신경림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

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

몇 십만이 모이는 유세 장을 마다하고

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 했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세월/신경림

 

흙 속을 헤엄치는

꿈을 꾸다가

자갈밭에 동댕이쳐지는

꿈을 꾸다가……

 

지하실 바닥 긁는

사슬소리를 듣다가

무덤 속 깊은 곳의

통곡소리를 듣다가……

 

창문에 어른대는

하얀 달을 보다가

하늘을 훨훨 나는

꿈을 꾸다가……

 

 

집으로 가는 길/신경림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 바랜 수채화 같은 것

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가슴에 피로 새긴 증오도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

 

 

초원/신경림

 

지평선에 점으로 찍힌 것이 낙타인가 싶은데

꽤 시간이 가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무토막인가 해서 집어든 말똥에서

마른풀 냄새가 난다.

 

짙푸른 하늘 저편에서 곤히 잠들었을

별들이 쌔근쌔근 코 고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다.

 

도무지 내가 풀 속에 숨은 작은 벌레보다

더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가 가서 살 저세상도 이와 같으리라 생각하니

갑자기 초원이 두려워진다.

 

세상의 소음이 전생의 꿈만 같이 아득해서

그립고 슬프다.

 

 

고사리평원에 무엇이 살까

 

 

평원

 

이곳에는

평화 이외에는

없다

 

 

비구름 하나둘 저 하늘로 올려보내는 한라를 마주보며 걷는다

 

 

삼형제 소나무의 그늘 아래로 걷는다

 

 

오래오래 보자, 친구야

하나하나 꽃잎 떨구며 시들어가지만

행복하자,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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