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629번지 원주 명봉산 법천사지. 국가지정유산 사적으로 면적은 14만 2,122㎡에 달한다. 텅 빈 폐사지에 1086년 건립된 지광국사탑비, 당간지주 등의 석조물이 남아 있으며, 탑비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탑비전지(塔碑殿址) 옆 요사지에서는 불상의 광배와 불두, 파불, 배례석, 연화문대석, 용두, 석탑재 등이 발굴되었다. 지광국사탑비 옆에는 원주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도 있었으나 일본으로 밀반출되는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고 지금은 이곳 법천사지 역사관으로 돌아와 머물고 있다.
법천사지 역사관 안의 지광국사현묘탑. 이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은 우리나라 부도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다. 국보 제 10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기단과 탑신의 파격적이며 화려한 장식들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팔각형 기단부 위에 종형의 몸체를 올리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는 팔각원당형의 전통적 부도 양식에서 벗어나, 사각형의 기단부에 탑의 모습을 한 파격적인 형태의 부도인 것이다. 그리고 그 파격을 아름다운 조각으로 마무리하며 참으로 현묘한 세계를 구현한 탑이 바로 이 탑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산산조각나서 해체된 채 전시되어 있다. 지광국사현묘탑이 머물고 있는 법천사지 역사관은 2024년 10월말까지 폐쇄 예정이다. 창문밖에서 언뜻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었다.
지광국사현묘탑은 고려 문종의 스승이며, 문종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의 은사인 지광국사 해린 스님이 열반하자 고려 선종 때 이르러 조성된 부도탑이다. 그러나 이 지광국사현묘탑은 100여년 동안 이곳을 떠나 오래도록 떠돌았다. 현묘탑은 1911년 한 일본인이 이 탑을 해체하여 일본인 상인에게 넘긴 이후에 일본 귀족 후지타에 의해 일본 오사카까지 밀반출 되었다가 비판 여론으로 인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조선총독부의 소유물이 되었다. 그 이후에도 현묘탑은 경복궁의 건춘문, 경회루 등지를 떠돌다가 1951년 한국전쟁 와중에 포탄에 맞아 상륜부가 산산조각난다. 그것이 1957년 이승만의 눈에 띄어 복원에 들어갔으나 콘크리트 땜질에 60여개 철심을 박아놓으며 그 아름다움은 회복하기 어려웠다. 현묘탑은 이후 또다시 해체되어 고궁박물관에 옮겨져 있다가,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보존처리 결정에 의해 그동안의 행각을 마무리 지을 것으로 보여졌으나, 그 이후에도 여러 어려움을 겪다가 마침내 이곳 법천사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토끼가 사는 달님
삼족오가 사는 해님
향공양을 올리는 비천상. 현묘탑에 새겨진 궁극의 아름다움은 탑신의 각면마다 가득하다. 꽃과 구름과 해와 달을 비롯하여 삼라만상이 이 탑에 머문다. 그러나 이 조각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과연 '보여지는 아름다움'뿐이었을까.
다시 법천사지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법천사지 삼층석탑의 부재들
쌍탑 1금당 배치를 보여주는 주요한 유물들이다.
당간지주
높이가 3.9m로 법천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 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법천사(法泉寺) 봉명산(鳳鳴山)에 있다. 고려 때의 중 지광(智光)의 탑비가 있다. ○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이 일찍이 이 절에서 학문을 강의하였는데, 배우러 오는 자가 먼 곳에서 모여들었다. 권람(權擥)ㆍ한명회(韓明澮)ㆍ강효문(康孝文)ㆍ서거정(徐居正) 같은 이들은 뒤에 다 큰 이름이 있었다. 그들이 여기에서 배울 때 탑 위에 시를 써 놓은 것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 강효문의 시에, “서울에서 일찍이 서로 약속하였더니 타향에서 다시 만났네. 찬바람은 옥각(屋角)에서 울고 쌓인 눈은 산허리에 가득하구나. 급(笈)을 지고 배우러 오는 길은 비록 멀지만, 벼슬길에 오르는 길은 멀지 않으리. 나는 서유자(徐孺子)의 호기(豪氣)가 아이들 무리에 으뜸인 것을 사랑한다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지난해에 글 읽던 곳, 광산(匡山)에 또 불리어 가네. 행장을 말등에 높이 실었고, 서적은 소 허리에 가득 실었네. 건곤은 넓고 넓은데 도로는 멀고 멀다. 영웅으로 시대를 만나게 될 자는, 필경 우리들의 무리 중에 있을 것이다.” 하였다. ○ 유윤겸(柳允謙)의 시에, “안탑(雁塔)에 이름을 쓰는 것은 옛날부터 전하는데 제군(諸君)에게 붙이기에는 어질지 못한 것이 부끄럽구나. 지금에 두려워하는 것은 비로 인하여 이끼가 올라서, 그것을 손으로 어루만져도 당년(當年)의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지나 않을런지.” 하였다.
권람(權擥)ㆍ한명회(韓明澮)ㆍ강효문(康孝文)ㆍ서거정(徐居正) 등이 이곳에서 배우며 가열찬 논쟁을 벌였다고 하여 이곳의 지명도 부론富論이다. 그들은 왜 이곳으로 모여들었을까.
명봉산 기슭 현묘전
지광국사현묘탑을 중심으로 하여 탑전과 요사채 등이 들어섰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광국사는 1070년 10월 이곳 법천사에서 열반에 들었고, 동편 산기슭에서 다비를 하였다.
아름다움의 절정
그러나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현묘탑은 오래도록 이 자리로 돌아올 수 없었다.
지광국사는 고려 문종 때의 국사(國師)이다. 대장경을 각경하는 등 불국토 건설에 전력했던 문종은 지광국사를 지극히 섬겼다. 문종의 넷째아들은 대각국사 의천이다. 문종은 의천에게도 지광국사를 은사로 섬기게 하였다.
현묘탑지 옆으로 서 있는 현묘탑비. 귀부, 비신, 이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귀부와 이수는 화강암으로 조성하였고, 비신은 흑대리석으로 이루어졌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5m이고, 이 중 비신의 높이는 2.95m이다.
증시지광국사현묘지탑비명贈諡智光國師玄妙之塔碑銘. 이 탑비에는 지광국사가 고려 문종 24년 1070년 입적하자 그로부터 15년후인 고려 선종 2년 1085년에 이 탑을 세웠음이 기록되어 있다.
독특한 모양의 귀부
얼굴은 용의 모습이고, 몸통은 거북의 모습이다. 거북의 등껍질에 귀갑문(龜甲文)과 왕(王)자를 새겨놓았다.
구름 위를 날아가는 용이 새겨져있는 비신(碑身). 이 비신에는 지광국사 행적과 그 제자들이 기록되어 있다. 정유산이 비문을 짓고, 안민후가 글씨를 썼으며, 이영보와 장자춘이 새겼다. 지광국사의 행적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었고, 뒷면에는 그 제자들을 열거하였다. 정유산이 지은 비문에 의하면 "문수보살이 주나라 목왕을 돕고, 미륵보살이 양나라 무제를 도왔듯이, 지광국사 해린이 고려 현종의 고려 중흥과 문종의 불교국가 건설을 도왔다"고 쓰여 있다. 현묘탑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극치는 바로 지광국사에 대한 이러한 고려인들의 인식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에는 젊은 학자들의 논쟁으로 뜨거웠다던 법천사지
그 앞에 누군가 '서원'을 세워놓았다. 무슨 서원誓願 을 세웠을까.
지광국사는 1021년 평양 중흥사 법회에서 기자고도(箕子古都), 즉 기자조선의 옛수도로 돌아가자고 주창했다. 지광국사는 기자조선에서 고구려, 그리고 고려로 이어지는 역사 계승 의식을 확보하면서 고려의 역사관을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광국사현묘탑의 삼족오 문양 등은 그의 이러한 역사관을 표현한 것이라 할 것이다. 추측건대 지광국사의 이러한 역사관이 이 법천사의 가풍으로 이어지고 훗날 조선 초기 학자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부론富論의 장을 마련하게 하는 인연이 되었던 것이다. 법천사 역사관이 개관하는 날에 다시 인연이 닿기를 서원하며 기다림을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