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2608-6번지 일대 제주 4·3항쟁 유적지 다랑쉬굴로 가는 표지석이 용눈이오름 옆 길가에 서 있다.

1992년 다랑쉬굴에서 4·3희생자 유해가 발견되어 세상에 처음 알려졌을 당시만 해도, 그리고 그 이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다랑쉬굴을 찾아가는 길은 오로지 억새와 가시덤불 및 대나무숲으로 가려진 곶자왈을 헤치고 가는 수밖에 없었는데, 오늘 찾은 다랑쉬굴 유적지는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잘 정비되어 있었다. 이제 곧 4·3도 다가오는데 그날에는 이곳 ‘다랑쉬 4·3송이길’을 천천히 걸으며 바람이 전하는 4·3의 슬픈 이야기에 마음을 기울여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다랑쉬오름 방향에서도 유적지에 접근할 수 있도록 조성된 ‘다랑쉬 4·3송이길’

다랑쉬오름 남쪽 ‘잃어버린 마을’ 표지석 근처에서 이곳 유적지까지 이어졌던 그 고통스러웠던 옛길은 이제 찾아보기가 어렵다. 유적지 근처에는 주차시설까지 잘 정비되어 있다.

다랑쉬굴 유적지 주차장 옆길은 옛길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다랑쉬오름은 물론 용눈이오름 방향에서도 이곳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로를 정비해 놓았다.

용눈이오름에서 다랑쉬굴로 이어지는 길

다랑쉬오름에서 다랑쉬굴로 이어지는 길

다랑쉬굴 전망대. 세화리 다랑쉬굴은 1948년 하도리, 종달리 주민 11명이 피신해 살다가 발각되어 희생당한 곳이다. 군경토벌대는 이 굴을 발견하고 주민들에게 나올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주민들이 나오지 않자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를 불어넣어 고통스게 학살했다.
1992년 유해 11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굴이 발견되어 4·3 진상규명 목소리를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다랑쉬 굴 마을을 조사하던 ‘제주4·3연구소’ 연구원들에 의해 1991년 12월 발견되었으나, 당시 엄중한 사회현실을 감안 공개치 않다가 전문학자 및 언론사, 의사, 법률가들의 자문을 얻어 1992년 4월 1일 공개된 것이다. 공개된 지 45일 반에 유해는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다. 이는 유해발굴 파장을 차단하려는 정보기관과 행정당국이 서둘러 유족들을 회유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으며 이후 다랑쉬 굴은 내부에 유물들을 그대로 남긴 채 입구가 콘크리트로 봉해졌다. 『출처: 4·3 길을 걷다』

다랑쉬굴로 향하는 붉은 송이길

하늘에서도 다랑쉬굴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제주민예총작가들에 의해 설치된 조형물

다랑쉬굴의 연가 / 강덕환
그해, 어둠 속
마그마로 분출한 것은
끝끝내 밝히고야 말
역사의 몸부림이었으니
탯줄 사른 서러운 땅
마흔네 해 만에
바람으로 구름으로
우리들 곁으로 오시었으니
헤갈라진 마음들 추슬러
고르고 다독인 자리
뿌리 뻗고 가지 드리워
새 생명의 빛살로
이제랑 타오르십서
살아오십서

다랑쉬굴에서는 토벌대의 학살 직후 2명의 유해는 연고자에 의해 따로 수습되었으나, 구좌읍 종달리 주민 7명과 하도리 주민 4명 등 총 11명은 4·3이후 오랜세월동안 그 유해조차도 다랑쉬굴을 벗어날 수 없었다. 오래 불러도 대답없던 그 이름들이 이제는 돌벽에 새겨져 있다.

송이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만나는 봉긋한 곳이 다랑쉬굴이다

다랑쉬굴 안내문

그날은 1948년 12월 18일이었다. 토벌대를 피해 다랑쉬굴로 피신했던 주민 13명은 이 굴 속에 숨어있다가 제9연대 2대대 군인, 경찰, 민간토벌대 등에 의해 발각되었다. 당시 토벌대는 굴 속에 수류탄을 던져넣어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입구에서 짚에 불을 지피고 구멍을 막아 사람들을 질식시켜 살해했다.

다랑쉬굴의 입구. 직경 60cm 정도로 사람 한 명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크기이다. 이승만 군대는 짚에 불을 지피고 이 구멍을 막아 사람들을 질식시켜 살해했다.

다랑쉬굴 내부 모양. 길이 약 30m 정도의 용암동굴이다.

굴 입구에서 양쪽으로 사람이 머물만한 공간이 있다. 1992년 발견 당시 유해 10구는 오른쪽 굴에서 발견되었고 나머지 한 구의 유해는 왼쪽에서 발견되었다. 당시에 시신들은 연기가 자욱한 굴속에서 돌틈이나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죽어있었다고 한다.

다랑쉬굴 속에서는 솥, 놋그릇, 숟가락, 항아리, 양푼, 가죽신, 비녀, 혁대, 안경 등이 발견되었고 지금도 굴 내부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에 굴 속에서 발견된 이들 중에는 9살의 남자아이도 있었다.

1947년 5월 16일 미군정은 행정명령으로 조선민주청년총동맹, 즉 민청을 해산했다. 그러나 중앙 민청에서는 5월 21일부터 열리는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에 대응하기 위해 6월 5일 합법단체로 조선민주애국청년총동맹, 즉 민애청을 조직해 등록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47년 6월 6일 구좌면 종달리 해안가에서 마을 청년 200명 정도가 모인 가운데 민청 집회가 열렸고, 그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나 집회를 단속하던 경찰 3명이 다치게 되었다. 이러한 여파로 토벌대의 표적이 되었던 종달리 주민 등이 이 곶자왈로 피신했으나 결국 토벌대의 학살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47년의 유해들은 1992년에 발견되어 세상밖으로 나왔으나 45일만에 행정당국에 의해 강제로 화장되어 종달리 바다에 또다시 수장되었다. 다랑쉬굴 유해 발굴의 파장을 최소화하려는 조치에 의해서였다.

미군 「G-2 정기보고서, 1948. 12. 17」에는 제주 4·3 당시 진압군인 9연대는 전과를 올리려는 그들의 욕망 때문에 제주도민을 무차별 학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승만정권의 국가 폭력을 경험했던 제주도민들에게 탐라의 모든 곳은 매우 특별하다. 결고운 풍경마다 피맺히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니, 이제는, 꽃으로도 때리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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