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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오백 당오백(폐사지)

법정사

by 산드륵 2008.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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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은 것이었나 봅니다.

섬을 울리는 소리

그 소리를 따라 안개들이 모여듭니다.

 

 

오랫동안 안개에 쌓여있던

법정사의 진실

그 속으로 부는 바람을 따라

길을 다녀왔습니다.

 

1910년대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항일운동 진원지

1919년 3.1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난 제주도 내 최초 최대의 항일운동 진원지

법정사

 

거사 이후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진 후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법정사 옛 터로 찾아가는 길입니다.

 

이 길의 시작에

1980년대 이곳에 들어선

현재의 법정사가 먼저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자리는 

옛 법정사에 딸린 조그만 암자가 있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법정사를 보호하는 일종의 초소 역할을 했던 곳이라고 하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라산 관음사 밑의 산천단에서 백일기도를 끝내고

항일의거를 일으킬 것을 결의한

김연일, 강창규, 방동화 스님 등은

1911년 9월 이곳 법정악에 법정사를 창건하고

결사 준비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했습니다.

그래서 법정사의 스님들 중 한 분이

이곳에서 머물다가

일본 경찰들이 들이닥치면

도량석을 돌며 동방해탈진언주를 크게 외웁니다.

일본 경찰이 들이닥쳤다는 신호인 이 진언을 외면

계곡 건너편에 위치한 법정사 스님들은

미리 정해 놓은 수행굴 속으로 모두 피신합니다.

그리고 다시 일본 경찰이 물러가면

이번에는 천수경을 천천히 외웁니다.

천수경은 일경이 다 물러갔다는 신호였습니다.


그동안

법정악 계곡에 숨은 법정사 옛 터를 찾기 위해

여러 번 길을 나섰지만

그 일은 제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후원의 풍경소리, 천수경을 외는 독경 소리도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곳에

일본 경찰처럼 뒤져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에

풍경소리를 실은 바람을 따라 가면 곧장 가 닿을 수 있는 곳에

법정사 옛 터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현재의 법정사 법당으로 오르는 계단 바로 앞에서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가면 됩니다.

  

계단을 내려서서

지금 보이는 저 길로 곧바로 직진하십시오.

직접 가 보면 저 길보다는

왼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쉽게 눈이 가지만

그러다가는 자칫 법정악 숲 속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저 길을 내려서면 이 법정계곡이 나타납니다.

이 계곡 주변에는

오래전부터 스님들이 수행하던 수행굴이 산재해 있는데,

지금도 산신기도를 위해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곳곳에 가지가지 가건물을 설치해 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법정사 항쟁 이후 

오랫동안 사람들의 출입이 통제되었던 탓에

더욱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칫 계곡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으므로

오늘은 법정사 옛 터로 가는 길만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18년 10월 항쟁 이후 법정사가 불에 타 없어지기 전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던 스님들은

계곡의 바위를 정으로 쪼아

천연 절구를 만든 후 떡방아를 찧고

떡을 하여 부처님께 공양하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물길에 잘 다듬어져

다른 바위들과 구별하기 힘이 듭니다.

어느 바위에서 스님들이 떡방아를 찧었을까 궁금해 하며 계곡을 건너다 

문득 눈을 들어 위를 보면

법정악의 신비한 자태가

자욱한 안개를 벗으며 나타납니다.

   

저 법정이 오름 속에

법정사 옛 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계곡 먹돌로 탑을 쌓아 놓았습니다.

혹시 저처럼 법정악에서 헤매시는 산책님이 계실까봐...

저 바위 오른쪽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혹시나 바람이 저 탑들을 무너버릴 수도 있으니

다음에 가실 때는

님이 또 탑을 쌓아 주시길...

그렇게 앞서간 이를 따라가고 또 따라가다보면

바람도

안개도

우리의 길도

더이상 헤매이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게 되리라 믿습니다.


계곡에서 숲으로 들어섰습니다.

10여미터 전방에 법정사 옛 터가 있지만

초록의 숲을 구별하는 특별한 눈이나 갖고 있지 않는 한

이쯤에서 난감할 수도 있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옅은 물길을 따라가시면 안되고

계곡에서 올라온 방향 그대로 직진 하시면 됩니다.

숲에서 직진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직접 경험하시구요.  

 

안개속에 드러난 법정사 옛터.

말 그대로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이곳에서 김연일, 강창규, 방동화 스님 등 30여 인이

1918년 10월 7일까지 함께 지내면서

무장항일 거사를 계획했고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당시 일본경찰이 제주도민에 대한 탄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하나의 예로

일본인들은 집집마다 '신사라'라는 풀을 심어 공출토록 하였는데

이 신사라라는 풀은 아주 질겨서

배를 끄는 밧줄을 만드는데 제격이었답니다.

그래서 제주도 집집마다 이 풀을 심고 공출하고 다시 밧줄로 엮는 부역을 하느라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기억이 정말 싫었던 건지

지금 이 풀은 제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진각 지붕의 초집이었다는 당시 법정사는

일본군에 의해 모두 불타고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습니다.

집터를 다시 돌담으로 두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 법정사에서 출발한 항일무장세력들은

하원리에 이르렀을 때는 가담자가 400여명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재소를 공격하고, 전선과 전주 2개를 절단 무너뜨리는 등 공격에 나섰으나

곧 일본 순사들의 총격을 받고 퇴각하면서 흩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법정사 항일운동은

오랫동안 왜곡되어 오다가

최근에야 그 진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러기까지는

이곳 제주불교사 연구회의 오랜 노력이 숨어 있었음을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당시 스님들이 사용하던 밥솥입니다.

이제는 저렇게 그 형체만 겨우 남았습니다.

 

언제부터 피어있던 것일까요.

이 조그만 절터에는

지금 저렇게 산수국이 가득 피어있습니다.

고통받는 백성들 앞에 서서 총알받이가 되어 쓰러지자

맹세했던

그 날 그 스님들의 가신 터에

스스로 피어 헌화하는 산수국은

어느 바람이 실어 왔을까요.

   


돌담을 빙 둘러

꽃을 흩뿌려 놓았습니다.

 


당시 법정사 항일 운동 주요 가담자들은  

이후 모두 체포되어 옥사하거나 옥고를 치룹니다.

그중 강창규 스님의 쓸쓸한 여생은

지난번 서산사 참배시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주인 잃은 샘물은

무속인들의 기도처로 변해 있습니다.

지금은 샘물 위에 씌워놓은 지붕마저 무너져

저렇게 흉물스럽습니다.


법정사 옛 터를 참배하고 내려온 후

법정사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400인의 신위와 66인의 영정을 모시고

2004년 법정사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새로 조성했다는

인근의 의열사를 찾아보았습니다.

 

화창하던 지난 날 찾았을 때도

그리고 안개 속 오늘도

의열사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그런데 구태여

맑은 날의 사진을 피한 것은

부끄러움 때문입니다.

 

시멘트 덩어리와 철근 구조물이 그대로 방치된

길의 끝 

열리지 않는 의열사....

 

생각이 많아집니다.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곧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버립니다.

그리고 다만 소망합니다.

 

제발 이것이 끝이 아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