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가네
사람이 떠나가네
그 떠난 자리에
사람이 또 오고
사람이 또 가네
서귀포시 보목동 엷은 개울 옆
혜관정사
일제강점기, 해방시대, 그리고 제주 4.3까지
온몸으로 그 고통을 고스란히 견뎌내야 했던
제주불교사의 산증인 혜관스님이 머물다 떠나신 곳
혜관정사.
복이 없어
오래 찾지 못하다가
이제야 다시 걸음하였습니다.
혜관스님!
혜관스님은
해방전후기에 조선불교혁신을 위해 투쟁했던
원문상 스님의 속가 동생이고
근대 제주 불교의 교육 사상가였던
이세진스님의 상좌였습니다.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만큼이나
치열한 삶을 살다 간
그 스승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혜관스님의 여정은
힘들었지만 행복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4.3의 광풍이
두 분 스승을 한꺼번에 휩쓸어 가 버리면서
스님은
저 나무에 갇힌 사람처럼
두 눈 부릅뜨고
지옥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민중이 지옥 속에 있다면
부처도 그곳에 함께 있어야 했기에
기꺼이 선택한 길
스승들의 죽음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본 후
오래 침묵하던 혜관스님이
이곳에 혜관정사를 세운 것은 1960년의 일
대웅보전 앞의 오래된 향로 앞에서
두 손 모아 보지만
이제는 그 혜관스님의 향기마저
아주 떠나고 없습니다.
다만 녹슨 보살상 앞에서
쉬 떠나지 못하는
내 마음만
옛 사람 균여처럼
마음의 붓으로
떠난 님들을 그려볼 뿐
대웅보전 2층에 들어선 여래전신칠보묘탑도
이제는 녹이 슬어
안간힘을 써야 겨우 안으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묘탑문!
신장님이십니까?
신장님께 허락받고
탑 안으로 들어서니
둥근 탑 천장 가득
구름을 타고 노니는 보살님들이
진신사리탑에 예경하고 있다가
슬며시 들어서는 중생을 맞이합니다.
천상의 보살님들이 보시기에
오늘 우리 중생들의 삶은 어떠한지...
무어라 할까....
이곳의 모두가
말을 잊은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의 집들을 내려다 보시는
관세음보살님의 뒷모습도
먼 길 떠나는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뒷모습처럼
온갖 마음을 감추고 있습니다.
혜관스님이 가실 때처럼
변함없이 저렇게....
그러나
그 무거운 마음을 다 벗어버리라고 말하는 듯
묘탑에서 내려다 보이는
종각의 용두상은
초등학생이 손으로 빚어 놓은 작품처럼
촌스러운 게
오히려 마음에 편안한데
웃기만 하는 용이 못미더운지
탑을 빙 둘러가며
묘법연화경을 수호하고 계시는 님들!
흐믓하게 이해하고
미소로 화답합니다.
2001년 혜관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머무시던 소소소(少笑所)
작은 미소가
머물던 자리
그 미소를 제자들과 나누시던 일여당(一如堂)
향적실(香積室)에도
스님의 손길은
여전한 것 같은데
이젠 스님조차
탑으로만 기억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공(空)이라는 걸 새삼 깨닫고
미련한 미소만 짓습니다.
이렇게 핀 연꽃도 보셨습니까?
다라에 핀 연꽃
그렇습니다.
어디든 연꽃은 피고
어디든 부처는 오시고
...
제주의 아픈 역사와 함께 했던
님들은 이제 모두 떠나가고
우린 또 궁핍한 이유를 대며
그들을 잊고 있지만
저 다라에 핀 연꽃처럼
그곳이 어디든
마다않고 계셨던
선지식들을 생각하며
오늘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를 살펴보는 것도
한번쯤은 필요한 일 같습니다.
그러면 가신 님들도
다시 미소로 화답해 주시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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