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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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量 無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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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量寺無量寺無量寺無量寺無量寺無量寺無量寺
無量寺無量寺無量寺無量寺無量寺無量寺無量寺
無量寺無量寺無量寺無量寺無量寺無量寺無量寺
묶을 수 없는 바람처럼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부처님의 세계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인연닿은 곳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
만수산 무량사 일주문입니다.
이곳에서는 정처없이 불어온 바람일지라도 합장을 하고 잠깐 멈추어야 합니다.
일주문 앞에 멈추어 서서
만수산 무량사라 쓰여진 일주문 편액을 자세히 올려다 보면
사진과 같은 대한민국 지도가 조각된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이 다 마음의 작용이니
꿈길에서 벗어나 이쯤에서 본래 진면목을 찾아 들어가라 하는데
눈어두운 중생은시력을 높이는데만 정신이 팔렸습니다.
달은 못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본 셈인가요.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 돌아다 보니
내가 들어선 곳은 광명문(光明門) 안!
이미 찬란한 빛의 세계로 들어서 있었습니다.
서방정토의 빛을 쫓아
무량사의 고즈넉한 길을 따라 걷다보면
먼저 단아한 자태의 당간지주가 눈에 띕니다.
통일신라 시대의 정형화된 모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고려시대의 당간지주입니다.
무량사
9세기경 범일 국사가 창건하였고 신라 말기 고승 무염대사가 머물렀던 곳.
보물 제233호인 석등과 보물 제185호인 오층석탑 뒤로 극락전이 보입니다.
극락전은 보물 제 35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웅장한 그 규모와는 달리 산사에는 고요함이 짙게 베어 있어
알 수 없는 쓸쓸함이 어깨를 떠미는 듯 하였습니다.
저 오층석탑에서는 1971년 탑을 보수할 때
5층 몸돌에서 청동합 속에 든 수정병, 다라니경, 자단목, 향가루, 사리와 사리장치 등이 나왔고
1층 몸돌에서는 남쪽을 향하여 있는 고려시대 금동아미타삼존불이 나왔습니다.
석탑 뒤의 극락전은 겉으로 보기에는 2층으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천장까지 뚫린 통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장엄한 부처님의 극락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타서 인조 때에 다시 중창하였습니다.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불!
그 웅장함에 환희심이 절로 납니다.
가운데 아미타불을 모시고 양 옆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셨습니다.
이 아미타삼존불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불로서는 동양 최대의 규모입니다.
카메라에 다 담을 수가 없어서 옆으로 비껴 찍었습니다.
웅장한 아미타삼존불의 찬란함 때문에극락전은 오히려 검소하게 느껴집니다.
조선 인조 때 여러 가지 기이한 행적을 남긴 진묵 대사도
이 장쾌한 무량수불에 점안을 하고 나서 기분이 너무 좋아
만수산 나무 열매로 술을 빚어 마시고 그 호방한 시심을 토해냈다고 합니다.
이쯤에서 진묵대사의 시 한 수 읊어봅니다.
하늘은 이불, 땅은 요 삼고
산은 베개 삼아 누웠으니
달은 촛불, 구름은 병풍
서쪽바다는 술 항아리가 되도다.
크게 취하여 문득 춤을 추다가
내 장삼을 천하 곤륜산에 걸어두노니!
극락전의 소슬빗꽃살창!
퇴색하여 비로소 아름다우니
진묵대사가 다시 온다면
이 꽃살창 앞에서 또 어떤 시를 토해낼지 궁금합니다.
무량사 동종.
이 동종은 조선 중기 전통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종에 새겨진 문양과 배치를 통해 다라니 신앙 또는 밀교적 신앙 등
당시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다리에는 연꽃을 장식한
용의 역동적인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이 무량사는 불가에 입문한 매월당 김시습이
1493년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합니다.
사진은 산신각에 모셔진 김시습 영정입니다.
무량사 일주문 왼쪽 문수암 가는 길로 접어들면
부도밭이 보이는데 김시습의 부도가 이곳에 있습니다.
사진 가운데 팔각원당형의 부도가 김시습의 부도입니다.
김시습이 죽을 때 화장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하여 3년 동안 시신을 두었다가 장사를 지내려고 열어보니
그 모습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살아있을 때와 그대로여서 생불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화장을 하니 사리 1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일제시대에 태풍이 불어 부도밭 뒤의 소나무가 쓰러지면서 이 부도도 쓰러졌는데
그때 부도 속에서 사리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사리는 지금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전문가의 소견에 의하면
조선중기의 부도이면서도 초기 부도의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이 매우 이채로운 경우라 합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저는 사진 오른쪽 부도에 더 마음이 갔습니다.
노란 상사화가 미처 못다한 마음을 전하듯 홀로 피어 있습니다.
외산리 유일한 조립식 병원 연세 의원에서 엉덩이 주사를 맞고 나와 참배를 한 터라
마음이 조급하였는데 해마다 홀로 피어 공양하는 저 노란 상사화를 보니 마음이 저절로 여며졌습니다.
꽃으로 피어서라도 공양하고픈 간절한 마음
그 마음 그대로 무량무수 아미타 부처님 전에귀의합니다.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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