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4월 3일 발생하여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되기까지
제주 사람 9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간
제주 4.3
제주의 모든 길이
4.3으로 가는 길 아닌 길이 없지만
과거에는 두려워서 끊겼었고
이제는 환금 가치가 없어서 그 길은 끊긴지 오래다.
성읍초등학교
성읍리는 성읍지서에 토벌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무장대로부터 보호 받고 있었으나
1949년 1월 13일 군경 합동 토벌 작전으로 마을을 비운 사이
무장대의 공격으로 전소되었다가 82년 다시 재건된 곳이다.
성읍초등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일주도로변의 효열각
열녀 송씨와 효자 강씨를 추모하는 곳이다.
효열각 옆 애향 용사 순국비
당시 무장대의 공격으로 희생당한 마을 주민들을 추모하여
1961년 성읍리 4-H에서 세운 것이다.
그들과 함께
토벌대에 의해 희생당한 마을 주민들의 명단과
이들에게 발포를 명령한 이의 이름까지도
이제는 명백하게 새겨져야 하지 않을까 한다.
표선으로 들어왔다.
표선 관통사로 가는 길 왼쪽에 옛 변전소 자리가 보인다.
길 건너 대형 교회가 세워지고 있으니 찾기는 쉬울 것이다.
변전소 바로 밑 과수원 자리
이곳이 옛 버들못 자리이다.
4.3당시 표선에는
2연대 1대대 2중대의 1개 소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자체 피해는 적었지만
그대신 인근 주민을 모아놓고 학살하던 총살장이었다.
표선리민들은 그 학살 현장에 동원되며
모진 추억을 가슴에 새겼다.
마소에게 물을 먹이던 물통과
버드나무가 흐드러져 버들못이라 불렸던 곳
이곳에서 표선국교에 수용되었던 가시리 마을 사람 70여명이
토벌대에 의해 총살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시체는 흙으로 덮힌 채 버려져 있다가
다음 해 하나둘씩 유족들이 찾아와 수습해 가기도 했다.
버들못에서 봄쑥을 캐는 아낙에게 물었다.
버들못이 어디냐고...
아낙은 그런 곳은 알지도 못한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흔적조차 사라진 버들못에서 쓸쓸하여 말을 걸었다가
마음에 사슬 하나만 더 동여매었다.
돌아서며 생각했다.
해마다 절로 돋는 저 봄쑥은 기억하고 있을까.
그날 저곳에서 흐르던 피의 냄새...
기억하지 못한대도 괜찮아
그저 정직한 시선으로 바라만 보아줘도 괜찮아
봄의 무꽃은 괜찮아
그날도 피었고 오늘도 피었잖아
이제 곧 4.3이다.
61년주년을 맞고 있지만 그 현실은 암담하다.
표선 해수욕장 길을 따라 표선면 도서관 입구의 학살터를 찾았다.
도서관 입구의 공터.
이곳에서 표선 인근의 가시리, 토산리 사람들
그리고 남원의 의귀리, 한남리, 수망리 등지에서 끌려온 많은 가족들이
영문도 모른 채 이념의 희생양이 되어 갔다.
도서관 입구 이곳에
하다못해 표지판 하나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너무 과한 것일까.
표선 백사장 한모살
토산리민 2백여명이 희생된 곳.
죽이기에 좋아?
사람의 심장을 조준하는 이념이 있다는 게
나로서는 그저 무서울 뿐이다.
표선초등학교
4.3 당시
소개당한 가시리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던 곳.
이곳에 모여 있다가 버들못에서 총살.
바로 밑 한모살에서
또 누군가의 심장을 겨눌 때에는
그 총소리가
나뭇잎까지도 떨게 만들었을 듯하다.
초등학교 바로 옆에는 옛 면사무소 자리
지금은 제주은행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는 2연대 1대대 2중대 1개 소대가 주둔하면서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끌어다가 취조하고
끝내 한모살로 끌고가 총살시키곤 했다.
당시 면사무소 앞에는
중산간 마을 사람들을 취조하기 위해
유치장으로 사용할 임시 움막까지 지어졌었다 한다.
제주의 길.
그 모든 길은 4.3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정권 하에서 그 모든 길은 다시 봉쇄되고 있다.
이정권의 모습에서 그날의 토벌대를 다시 보는 듯하다.
그들 스스로는 공적이라 내세우고 훈장까지 부여하는
그날의 토벌대가 지나간 길로
이제는 무심한 봄꽃만 피었다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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