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령리 선인장 꽃은
아무도 꺾으려 들지 않는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가시가 돋는 아픔 하나가
이곳에 묻혀 있는 까닭 때문이라고 말하며
너절한 시인 흉내를 내지는 않겠다.
한림읍 월령리 무명천 할머니가
가시밭길보다 더한
그녀의 고단한 일상을 눕혔던
조그만 집.
정낭을 걸어놓고 떠나실 때
차마 두 눈은 감으셨는지
무명천 할머니
할머니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2009년 국가 권력의 폭력이 난무하는 대한민국에서
'아름다워요'라는 단어는
화보를 찍는 한나라당 나00 의원에게나 쓰는 말이고
무명천 할머니 앞에서는
어떤 수식도 깊은 절망일 뿐이다.
1914년에 태어나
1949년 제주 4. 3 당시
사람을 토벌하러 들어온 이승만의 친구들, 그 토벌대의 총에 맞아
턱이 날아가고 그로부터 55년.
평생을 앓던 후유 장애와 심장질환 등으로
병원에 입원하러 가시던 날 벗어놓은 저 신발은
다시는 신어보지 못하셨다.
살아서는 가져보지 못했다는 문패 앞에서
할머니가 평생을 곱씹었을 '삶'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 삶은 그녀에게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웠을까,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웠을까.
할머니, 저 와쑤다!
진아영 할머니
대한민국을 접수하려면
저들끼리의 혼란과 분열을 심어주고
그 위에 평화를 가장한 점령군으로 들어서면 된다고
코쟁이들은 생각했나?
그래서 이승만이 필요했나.
그래서 저 여인의 턱을 날려 버렸나.
제주도민들을 무차별 살육했던 그들에게
무명천 할머니의 저 일그러진 얼굴은
훈장이었다.
오랜 세월 왜곡으로 점철되던 제주 4.3은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루어진 것을 사과한다"라고 공식화하여
비로소 그 진실이 드러나는 듯 했다.
그러나 2009년 현재
다시금 제주 4.3을 왜곡하고
제주도민을 우롱하며 분열시키려는
그 모든 권력 앞에서 내 아랫턱마저 쓰라려온다.
진실에 대한 왜곡은
바로 1948년 4.3 사건 당시 제주를 살육한 그들의 속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1949년 토벌대에 의해 아래턱이 날아가고
이후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언니가 있는 이곳 월령으로 옮겨와 평생을 혼자 사셨다는 할머니
할머니의 유품
말을 하지 못했으니
누군가 써 준 종이를 내밀어 할머니는 말씀하셨겠다.
"쥐약 주세요!"
문을 열면 부엌 한 간 방 한 간
그곳에 어느날 시계는 멈추고
달력은 2001년에 멈추어 있다.
2001년 평생을 앓아온 슬픔과 함께 병원으로 실려가며
모든 것은 이미 멈춘 것이다.
빛깔 고운 한복 입고
립스틱 바르고 어딜 가고 싶으셨나.
시인은 노래하지만
나는 노래하지 않겠다.
울담 밑에 쪼그려 앉아
울었다고도 말하고 싶지 않다.
혼자 먹었을 양은 뺀또 앞에서
나의 소리는 외마디다.
제기랄...
머리가 아프다.
새 한 마리 쉬어가게 해 놓고
할머니는 이제 훨훨 떠났다.
할머니 댁에서 나오면
새가 날아도 흔적없는 바다
거짓말도 싫다.
부풀리는 건 더 역겹다.
단지 그날 그녀에게 총을 들이댔던 자들에게
할머니께서는 이미 2004년에 돌아가셨음을 통보해 드릴 뿐이다.
>
'4 와 3'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픈 길... 슬픈 눈...제주 4.3공원의 그 사람 (0) | 2010.04.28 |
---|---|
다시 찾은 낙선동 4.3 성터 (0) | 2009.10.03 |
4.3의 길을 따라 성읍에서 표선까지 (0) | 2009.03.28 |
제주 4.3 평화 공원 (0) | 2008.05.11 |
문형순... 그리고 모슬포 (0) | 2008.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