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29일 낮
은해사 일주문 앞에서
뒤에 우뚝 솟은 산을 보며 물었다.
저 산이 무슨 산이냐고.
무뚝뚝한 사내는 여기가 팔공산 안이라고 답해준다.
그럼..... 우리가 건너온 팔공산 밖은 어디쯤이었나.
은해사로 들어서서 중암암으로 가는 길을 탔다.
고행길을 걸으리라 단단히 마음먹었었는데
일주문 관리소 아저씨가 한파로 걷기 어려우니 차를 타고 가라 해서 마음이 약해졌다.
가파르게 경사진 길을 달리다가
시멘트 길을 흰눈 쌓인 빙판으로 착각하고 차를 세워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은해사에서 2500여미터 정도 올라간 곳에 인적이 보인다.
부모미상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을 찾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공부방을 기웃거렸을까.
작은 구름 하나 떠돌다 가노니
지금 내 자리가 소운당이다.
천천히 돌산을 오른다.
단풍은 낙엽이 되기 전 이미 얼었다.
천왕문
바위 틈으로 돌구멍절 중암암이 언뜻 보인다.
좁은 바위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니 법당과 종무소가 나타난다.
중암
당당한 위용이 금방이라도 사자후를 토할 것 같다.
갑자기 얼음비가 내렸다.
햇살 속에서 실바늘같은 얼음비가 쏟아져 허공이 반짝였다.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다.
찰나였다.
금당 옆 천태난야와 산신각
천태난야라는 현판이 붙은 조그만 전각으로 들어가면
나반존자가 모셔져 있다.
일심삼관(一心三觀)의 지관(止觀)의 실천을 강조하는 천태종과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돌구멍절의 해우소
정월보름에 볼 일을 보면 섣달 그믐에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그 유명한 해우소이다.
해학의 고수들이다.
신라 헌덕왕의 아들인 심지대사에 창건된 돌구멍절
아버지 헌덕왕이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을 때
효성과 우애가 깊었던 심지대사가 느껴야 했던 절망이
이 바위산 깊은 계곡에 그대로 새겨진 듯하다.
원성왕(785∼798년)이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으로부터 왕위를 훔치고 나서
그 손자인 헌덕왕(809∼826년)이 조카 애장왕(800∼809년)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으면서부터
신라 왕실은 근친간의 왕위 다툼으로 편할 날이 없게 된다. 특히 헌덕왕의 아우인 흥덕왕(826∼836년)이 죽고 나서는 다툼이 극에 이른다.
이미 헌덕왕 14년(822) 정월에 헌덕왕이 그 아래 아우인 흥덕왕을 태자로 삼고
그 아래 아우인 선강(宣康)태자 충공(忠恭)을 각간으로 삼으니,
선강태자 김충공은 흥덕왕 10년(835) 2월까지 13년 동안 상대등 자리에 있으면서 대권을 행사한다.
사실상 부군(副君)의 위세를 누렸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선강태자 김충공이 흥덕왕에 앞서 흥덕왕 10년에 돌아가게 된다.
이에 흥덕왕은 충공의 맏사위이며 자신의 사촌아우인 아찬 김균정(金均貞)을 상대등으로 삼고
충공의 장자인 대아찬 김명(金明, 817∼839년)을 시중(侍中)으로 임명한다.
그런데 흥덕왕이 다음해인 흥덕왕 11년(836) 12월17일에 갑자기 돌아간다.
후사를 분명히 결정하지 않은 채 돌아갔던 듯하다.
이에 상대등 자리에 있던 김충공의 큰사위 김균정이 김양(金陽, 808∼857년)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나아간다.
김양은 명주군왕 김주원의 증손자로 태종 무열왕의 9세손에 해당하므로
왕위 계승문제에서 발언권이 가장 강한 인물이었다.
그러자 당연히 왕위 계승 서열 1위로 생각하던 시중 김명은 이에 반발하여 작은매형인 희강왕 김제륭(金悌隆, 836∼838년)을 부추겨
왕궁으로 쳐들어가서 큰매형인 김균정을 잡아 죽이게 한다.
김제륭은 김균정의 손아랫동서이기도 했지만 친조카이기도 했다.
김명의 야심을 눈치채지 못한 김제륭은 큰동서이자 숙부인 김균정을 죽이고 자립하고 나서
처남인 김명을 현재 총리격인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이때 김명의 나이 21세였다.
그러나 김명은 자신에게 대권을 넘겨줄 줄 알았던 작은매형 희강왕이 자립하여 보위에 오르자
이에 불만을 품고 희강왕 3년(838) 1월에 시중 이홍(利弘)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의 좌우를 살해한다.
김명의 야심을 그제서야 눈치챈 희강왕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줄 알고 목매 자살하고 말았다.
이에 김명은 22세로 보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희강왕 2년(837) 5월에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은
김명의 야심을 간파하고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처자를 거느리고 달아난다.
그는 낙동강 하구인 양산 황산강(黃山江)에서 배를 타고 장보고가 대사(大使)로 있는 청해진으로 간다.
장보고에게 1만 군사를 빌려줄 때 그가 시중으로 있으면서 이 일을 적극 후원했던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김우징은 여기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김명이 본색을 드러내 희강왕을 시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김우징은 군왕을 시해한 역적을 친다는 명분으로 장보고에게 군사를 빌려달라고 요청한다.
장보고로부터 5000군사를 빌린 김우징은 김양과 함께 3월에 무진주까지 공략해 들어갔다가
민심의 향배만 확인하고 되돌아온다.
민심의 소재를 파악하고 난 그들은 왕도 공략에 자신감을 가지고 군세를 다시 정비해
12월에 대공세를 취하여 쌍봉사 근처인 무주 철야현(鐵冶縣; 지금의 南平面)에서 왕의 군대를 대파한다.
승승장구 밀고 들어가 민애왕 2년(839) 기미 윤정월 19일에는 대구에 당도한다.
민애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대구 서교에서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왕군이 대패하여 죽은 자가 과반수나 되었다.
왕은 나무 아래에 서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패군하자 좌우가 모두 달아나 홀로 남게 되었다.
왕이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월유댁(月遊宅)으로 들어가니 병사들이 뒤쫓아와 왕을 시해하였다.
이에 우징의 조카이자 사위인 김예징(金禮徵) 등이 김우징을 맞아들여 보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신무왕(839년 4월∼7월)이었다..................................................................................최완수의 글
심지대사는
햇살을 만난 얼음비였을까
얼음비를 만난 햇살이었을까
돌길을 따라 올라 탑으로 섰다.
은해사 중암암 삼층석탑
통일신라 석탑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고있다.
삼층석탑 뒤로는 극락굴
커다란 바위들이 겹쳐 좁은 길을 내었다.
바위틈 간극처럼
극락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삼인암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 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 涅槃寂靜印
삼인을 새겨 극락굴에 다다른다.
극락굴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석탑의 모습이
아련히 마음에 닿는다.
바위와 하나가 되어 버린 만년송이 그렇듯
안과 밖의 경계조차 불필요한 세상이
있기는 있는가 싶다.
So Deep Is The Night - Lesley Garr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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