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평화 공원 내의 평화 기념관에서
제민일보 4.3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늦은 오후 절뚝이는 걸음을 옮겼다.
쉽게 접할 수 없는 자료들 앞에서
걸개처럼 늘어진 한 장 한 장 신문의 무게가 천근보다 무거워 보인다.
다랑쉬굴의 진실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사진이다.
제주에서는 금기처럼 여겨져 오던 4.3의 역사
모두가 알고 있었으나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던 4.3의 진실
1991년 4월 3일 최루탄이 난무하는 속에
4.3 추모제 행사 참석을 막는 경찰대
이틀에 거쳐 경찰에 연행된 시민과 대학생은 400명에 육박했다.
제주 4.3 당시의 인물들
진실을 알리고자 애썼던 김익렬 연대장
그리고 문형순 경찰서장의 모습도 보인다.
제주 4.3 평화 기념관 '의로운 사람'코너에는
김익렬 연대장의 유고록 원본과 집필할 때 사용했던 만년필과 안경 등이 전시되어 있다.
4.3 진압작전의 주역인 군정장관 딘 소장(왼쪽)과 제주도 군정관 맨스필드 중령
이승만과 더불어 4.3 학살의 최고 책임자들이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해 물러간 자리에 또다른 점령군 미군정이 들어온지 3년째되던 1948년
신탁과 반탁 구호가 난무하던 해방기 한국사에서
조국 통일과 완전한 독립을 기치로 무장 봉기를 일으킨
무장대 총책 이승진
대정중학교 교사였던 이승진은 김달삼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김익렬 연대장과의 4.28 평화 협상으로
1948년 4.3은 멈출 수 있었다.
그러나 5.10 선거를 통해 해방된 조국을 분단하고
남한 단독 정권 수립을 꾀하던 미군정과 이승만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학살의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유해진 도지사
살인병기 서청 단원들을 호위병으로 데리고 들어온 인물이다.
미군 보고서에는 '극우주의자(an extreme rightist)로 표현되어 있다.
진압군에게 무참히 학살당한 백조일손의 자손들 중 한 사람인 이도영 박사가
미국 정부 문서 보존소에서 발굴한 사진들.
전주 학살의 현장
제주 4.3 관련자들이
전주 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다른 재소자들과 더불어 함께 처형당했다.
당시 전주 형무소에서의
수형인 명단은 확인할 수 없어서
아직까지도 그 정확한 학살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눈이 가리우고 손발이 묶인 수형인 옆에
낫을 들고 선 헌병
학살의 현장
조선 옷의 양민들
1950년 9월 전주, 적들에게 살해된 한국인들이라는 미군측의 설명이 있으나
가해자는 밝히지 않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4.3이 국가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극이었음에
머리 숙여 제주도민들에게 사죄하고 있다.
대통령의 추도사.
한 글자 한 글자 되새긴다.
4.3이 결코 잊혀져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모두 들어있다.
제주 4.3 63주년 북촌리 희생자 합동 위령제가
북촌의 너븐숭이 4.3 위령 성지에서 봉행돼
억울하게 희생된 443위의 영령들을 위로하고 있다.
예산 부족으로 중단과 중단을 거듭하는 희생자 유해 발굴 사업
63주년 위령제
제민일보의 4.3 전시는 1층과 2층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실을 나와 어둠의 터널 속으로 들어간다.
4.3의 영혼들에게 보내는 짧은 서신들이 여기저기에 나뭇잎처럼 돋아있다.
절대로 죽을 수가 없어라고 말하는 4.3의 어머니
경찰 고문으로 숨진 양은하의 어머니
그러나 그날의 진실이 다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이제 그날의 어머니들은 여전히 젊은 얼굴의 아들들을 따라 하나둘 눈을 감고 있다.
제주 4.3 당시 시민에게 고하는 무장대 포고문의 내용
경찰관들에게 고하는 무장대 포고문 내용
민예총 제주지부장인 오석훈 작가에 의해 형상화된
'제주 저항의 역사'
양수의 봉기
탐라국의 고려에 복속된 이후 일어난 최초로의 민중 봉기
삼별초의 난
몽골에 굴복한 고려왕에 반기를 든 삼별초가
1271년 탐라로 항몽 거점을 옮기고
탐라민을 동원하여 항파두리 성을 쌓고 저항에 나섰으나
1273년 여몽연합군에 의해 20일만에 패했으며
탐라민의 피해가 상당했다.
1901년 제주 항쟁
대한제국 정부의 과도한 세금 징수와
외세를 등에 업은 천주교도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제주도민들이
1901년 무장항쟁에 나서 제주성을 함락했으나
프랑스 함대가 제주해안에 등장하여 위협하는 가운데 정부군이 파견되어 봉기를 진압했다.
이재수 등 장두 3명은 처형당했다.
법정사 항일 운동
1918년 서귀포시 도순동에 위치한 법정사의 주지와 신자 및 인근 주민 7백여명이
일제에 저항해 일어난 항일 운동이다.
1919년 기미 독립운동보다 1년 일찍 일어난 항일운동으로 역사적 의미가 깊다.
해녀 항일 투쟁
1931년부터 2년 동안 제주해녀들이 일제의 수탈에 맞선 항일투쟁
구좌읍 해녀들은 1932년 일본인 도사의 순시에 맞춰 격렬한 투쟁을 벌였고
사건 이후 해녀 대표들은 모진 옥고를 치뤘다.
현재까지의 자료로
제주도민의 9분의 1을 학살한 것으로 밝혀진 제주 4.3의 가혹한 진실
조천 중학교 사회선생님이었던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
체포되어 처형당한 이후에는 관덕정에 시신을 공개하고
어린이들까지 집단 동원하여 목격하게 하였다.
일본군 지원병 출신 연대장들이 줄줄이 제주로 들어온다.
이승만의 사병, 서북청년회도 제주에 입성했다.
상상을 초월한 고문 기술 전문가 집단과 굶주린 채 이승만에 이용당한 서청단원들이
제주를 장악했다.
총이 두려워 산으로 숨어들었던 남녀노소 모두
자유로울 수 없었던 시절
무장대 협력자를 가려내는 색출반(왼쪽)과 무릎 꿇고 심문을 받고 있는 하산인들의 모습
하산한 주민들, 주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대부분인 이들은
주정공장에 집단 수용되었다가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간다.
제주비행장에서 집단 학살된 채 묻히고, 제주 앞바다에 철사줄에 묶인채 수장된다.
살아남은 자들은
전국의 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생사를 모르게 된다.
총살되기 전 형무소 수감자들과 총살돼 구덩이에 묻힌 사람들
시신 사이에서 발 디딜 틈이 없다.
고개 숙인다.
눈을 감는다.
앞사람의 무명옷을 꼬옥 붙든다.
맨발의 시신들
손이 뒤로 묶인채 나뒹구는 시신들
확인 사살
4.3의 영혼들이 쇠창살 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 쇠문에 박힌 총탄 앞에서
학살자들은 이제 그만 스스로 정부 훈장을 떼어내고 참회해야 할 것이다.
제주 4.3이 일어난지도 이제 60이 훨씬 넘었다.
봄에 들에서 꽃 한 송이를 꺾어도
해마다 그곳에 가면 그 기억이 여전할텐데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이들에게 총구를 겨눴던 이들은
어찌 편안하신가.
몰래 참회의 엽서 한 장 띄우고 뒤돌아 울어야 할 사람들이
이제는 이곳을 찾아야 할 때인 것같다.
4.3의 영혼들이 이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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