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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와 3

노근리 평화공원

by 산드륵 2012.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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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 노근리 양민 학살 현장

 

 

 

3박 4일 이어진 미군 양민 학살 현장

 

 

  

1950년 7월 25일에서 7월 29일

그 5일 동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6.25 발발 6일후 참전한 미군은

전쟁 초기에 전선에서 밀리자

이곳 영동군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50년 7월 25일

미군은 원활한 전쟁 수행을 위해

영동읍 임계리와 주곡리 및 인근지역 주민 5-6백여명에게

남쪽으로 피난할 것을 유도했다.

 

 

 

미군의 명령으로

7월 25일 야간을 하가리 하천에서 노숙한 피난민들은

미군의 명령으로

7월 26일 정오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하여 국도에서 철로로 이동했다.

 

 

 

그리고 7월 26일

"피난민들은 모두 사냥감이다"

그 사냥 명령에 미군 폭격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3박 4일

 

 

 

더운 여름날

5-6백명이 피신한 저 좁은 굴다리 끝에서

안쪽으로 더는 숨어들지 못한 한 어머니가 두 딸과 아들을 품에 안았다.

어머니는 등 뒤에 쏟아지는 포탄의 열기에 더이상 살 가망이 없음을 짐작하고 읖조렸다.

"가기야 내가 먼저 가겠지만, 곧이어 나를 따라올 자식들은 아무 죄가 없으니 제발 좋은 곳으로 가게 해 주소서."

곧이어 어머니의 뒤쪽에서 총알이 날아왔고 두 눈과 등짝이 날아갔다. 누이들 가슴으로도 총탄이 박혔다.

부상 당한채 살아남은 어린 아들은 그날 그 어머니 음성을 지금도 듣는다고 했다.

어머니의 마지막 읖조림은 '살게 해 주소서'가 아니었다.

 

 

 

7월 26일에서 29일까지 쌍굴에 피신한 양민들은

굳은 피 위로 다시 굳은 피가 덮히는 것을 보면서도

스스로가 왜 사냥감이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날 기관총을 들었던 한 미군 병사는 증언한다.

"두려움에 가득찬 눈동자가 묻고 있었다. 쏠 건 가요?라고"

 

 

 

그날을 기억하며 늙은 미군 병사는 고개를 심하게 흔들며 오열했다.

"아니요, 나는 쏘지 않겠습니다. 나는 쏘지 않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의 폭격은 3박 4일 동안 이어졌다.

 

 

 

그렇게 죽어갔다.

그리고 잊혀졌다.

 

 

 

사건 이후 진실 규명을 위한 유족들의 피눈물나는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하에서 모든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그날의 포탄처럼 쌍굴 다리 천정에 벌집이 달라붙어 있다.

 

 

 

쌍굴다리에서 조금 올라간 언덕에서는

여전히 그날의 유해들이 발굴되고 있다.

 

 

 

경부선이 개설되면서 조성된 노근리 쌍굴다리

 

 

 

오늘도 무심히 기차가 지난다.

그 수많은 영령들 위로.

 

 

 

 

Mama put my guns in the ground
이 총들을 멀리 치워주세요
I can't shoot them anymore
더 이상 방아쇠를 당길 수 없어요
That cold black cloud is coming down
거대한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어요
Feels like I'm knockin' on heaven's door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느낌이에요

 

 

 

 

어머니

 

 

 

이 총들을 멀리 치워주세요 

 

 

 

어머니

 

 

 

그렇게 그날은 갔다.

 

 

 

그리고 그 날 이후 60여년이 흘러

유족들의 끈질긴 노력 하나로

마침내 2001년 미국 클링턴 대통려의 유감 표명을 이끌어냈다.

 

 

 

유감 표명

 

 

 

살인에 대한 '사죄'가 아닌 단지 '유감 표명'

 

 

 

다행히 2004년 노무현 대통령 당시 국회특별법이 통과되면서 노근리 평화공원이 조성되고

그날의 진실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지만 여전히 미국의 사죄는 없다.

역사에 대한 진실한 각성이 없이는 다음은 우리 차례이다.

 

 

그들이 처음 왔을 때/마르틴 니뮐러,1949

 

처음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유태인에게 왔을 때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이제는 나를 위해 저항해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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