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29일 오후
오후 2시 지구는 뜨겁다.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전북 부안의 변산반도 국립공원 남여치 공원 지킴터 입구에서 골짜기로 스며들었다.
월명암이 이곳 깊은 곳에 자리한 까닭이다.
가파른 봉래곡이 끝도 없이 이어지다가
지팡이를 짚고 긴 숨을 몰아쉴 때쯤
서늘한 산바람이 불어오며 쉬어갈 좌석을 마련해준다.
가슴 깊은 아득한 곳에서부터 시원한 해방감이 밀려온다.
느린 걸음으로 남여치에서 2.2km 길을 1시간 30여분 정도를 올라오니
봉래산 제 2봉 쌍선봉이 흘러 내린 곳에
월명암이 드러난다.
긴 호흡으로 산을 마신다.
산의 맑은 기운을 수혈하고 옷깃을 단정히 한다.
산을 온전히 일주문으로 삼은 관계로
월명암 현판은 요사채에 걸려 있다.
신라 신문왕 12년(692년) 부설거사에 의해 창건된 월명암 대웅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진묵대사가 중건했고
대한제국 말기에는 의병들의 근거지였다가 1908년 왜군과의 싸움에서 다시 소실되었다.
조선 헌종 14년 1848년 성암화상, 1914년 학명선사가 다시 일으켜 세웠으나
1950년 여순사건으로 또다시 소실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최근에 다시 복원되는 것들이다.
월명암을 창건한 부설거사는
신라 진덕여왕(제 28대) 때의 고승으로
원효, 의상대사와 같은 시대를 살다 간 인물이다.
부설의 속명은 진광세(陳光世)로
14세에 출가하여 영조(靈照), 영희(靈熙) 두 도반과 함께 중국 유학길을 나섰다가 표류되어 남해 바다에 정박하고 말았다.
이에 유학의 길을 접고 명산대천을 순례키로 한 이들이
전북 김제군 성덕면 고현리 만경 뜰에 도착했을 때 폭우가 덮쳐 인근의 재가 신도 구무원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이 구무원에게 묘화라는 벙어리 딸이 있었는데
부설을 보자 말이 트이며 전생에 풀지 못한 인연이 있어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부설이 거절하자 묘화가 하는 말이
"그대는 불도를 깊이 닦아수많은 중생을 구제하려 한다면서 어찌 소녀의 소박한 소망 하나 들어주지 못하는가" 라고 책망하였다.
마침내 부설이 허락하자 두 도반은 부설을 비웃으며 떠나고 말았다.
그가 사는 마을의 하늘엔 언제나 하얀 눈이 떠돌아 다녔다 하여
두능리 마을을 부설촌(浮雪村)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부설거사의 법명도 여기에서 왔다고 한다.
이후 10여년이 지난 어느날
부설은 권속을 모아 작별을 고한 후 부인과 남매를 데리고 길을 떠나 신문왕 12년 이곳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의 인연들은 부설암 월명암 등운사 묘적암 등에서 각각 수행의 길을 걸었다.
세월이 흘러
오대산에서 수행하던 옛 도반 영조 영희 스님이 부설거사를 찾아왔다.
두 도반을 맞이한 부설은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부설은 등운을 시켜
호리병 세 개에 물을 담아 처마에 달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각 막대기로 호리병을 내리쳤다.
먼저 내리친 두 스님의 호리병이 깨지면서 물이 쏟아졌다.
그런데 부설이 내리치자 호리병은 산산조각이 났으나
물은 호리병에 담겼던 모양 그대로 처마에 매달려 있었다.
호리병으로 무이無二의 법문을 내보인 부설은
다시 영조와 영희 스님의 도반으로 돌아와 있었다.
눈에 보이는 바가 없으니 분별할 것이 없고
귀에 소리 없는 참소식을 들으니 시비가 끊이는구나
분별과 시비를 모두 놓아 버리고
다만 마음의 부처를 보며 스스로 귀의를 하소.
그리웠던 도반들 곁에서
세상의 인연을 놓으며 읊은
부설거사의 열반송이다.
이제 그들은 떠났어도
눈맑은 수좌들이 여전히 찾아드는 곳
호리병 법문이 떠도는 이곳에서
부설거사의 팔죽시八竹詩 한 편을 되뇌인다.
이런대로 저런대로 되어가는대로 此竹彼竹化去竹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風打之竹浪打竹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대로 粥粥飯飯生此竹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른대로 是是非非看彼竹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賓客接待家勢竹
시정에서 사고 파는 것은 시세대로 市井賣買歲月竹
세상만사 내 마음과 같지 않은대로 萬事不如吾心竹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然然然世過然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