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6일.
심양 고궁을 찾았다.
심양 고궁은 청태조 누르하치와 청태종 홍타이지의 궁궐이다.
홍타이지 사망 이후
산해관을 넘어 중원을 점령한 청은 이후 북경의 자금성으로 옮겨가게 된다.
1616년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는
그동안 여진 통일을 방해하던 명나라에 대해
일곱 가지 원한을 발표하고
공격에 나섰다.
이때 명나라는 조선에게 지원병을 요청하였으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눈여겨보던 광해군은
이 전쟁에 휩쓸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결국 강홍립을 지휘관으로 한 지원군을 보내게 되었으나
광해군은 끝끝내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결국 사르후전에서 승리한 누르하치는 요동을 정복하고
심양으로 천도하였는데
바로 이곳이 그곳이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산해관을 돌파하지 못했고
명나라와의 싸움에서 상처를 입고 사망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홍타이지다.
홍타이지는
몽골칸의 지위를 이어받았으며
요동 한인을 지배하여
여진이라는 민족명을 버리고
만주라는 새로운 민족 명칭을 반포하였으며
1636년에는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외교관계에서 중립적 태도를 견지하던 광해군을 비판하며
인조가 쿠테타를 통해 집권하였다.
인조 반정 이후
홍타이지가 조선을 공격하니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그것이다.
홍타이지 사망 이후
채 1년도 되지 않아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에 의해 북경이 무너지고
명나라 왕인 숭정제가 자결하면서
청나라는 비로소 북경으로 입관하게 된다.
이때 청나라의 입관을 막고 있던 명나라 장수 오삼계는
농민군에게 길을 열어주는 대신 청나라에 투항하여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청나라가 자금성으로 이동하여 텅 비게 된 이 지역은
그후 청나라 황제들이 가끔 동순(東巡)하는 곳으로 남아있게 된다.
숭정전
홍타이지 시대에
정사를 논의하고 외국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입관 이후에는 제례를 지내는 곳으로 쓰였다.
황제를 상징하는 용.
원나라때부터 황실에서만
다섯개의 발가락을 가진 용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는데
경복궁 근정전 천장의 황룡은 발가락이 일곱개인 칠조룡이다.
숭정전 옥좌.
정대광명.
십이지신과 용들이 함께 어울어져 있다.
동액문.
이 문을 통해 동로로 들어가면
대정전이 나온다.
대정전.
2층 8각 지붕의 형태로
누르하치가 천하를 통일하는 기반으로 삼은
행정 및 군사 조직인 팔기(八旗)를 상징한다.
대정전 옆으로는 좌익왕,우익왕을 위시하여
만주 팔기를 지휘하던 지휘관들을 상징하는 8동의 건물이 있어
십왕정이라 불린다.
대정전,
한자와 만주어가 함께 표기되어 있다.
만주어는 누루하치가 몽골문자를 응용하여 만든 문자이다.
누르하치가 창안한 군사조직 팔기
팔기(八旗)의 지휘관.
누르하치는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을 8개의 단위로 나누어 통치하였는데
이 제도는 중국 통일 이후까지 지속되다가
태평천국의 난 이후에 점점 소멸되었다.
누르하치, 홍타이지
그들 부자의 옥좌
고궁 한쪽에서 공연이 한창이다.
시계를 본다.
중국접경지역 여행을 접을 시간이 다 되어간다.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본 우리.
고려인, 조선인.
이제 과거의 틀을 깨고
새로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