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 와 3

다랑쉬굴

by 산드륵 2016. 3. 20.
728x90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

 

 

1948년

10여 가호에 4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던

이 깊은 곶자왈 속 다랑쉬 마을에도

소개령이라는 것이 떨어졌다.

 

 

이 다랑쉬 마을 사람들은 

해안으로 피신하여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삶의 기반을 잃고 다시는 마을을 재건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오래도록 기억 속에서 잊혀졌던 이곳에서

군경토벌대에 의해 학살된 인근 주민 11명의 유골이 발견된 것은

1992년 3월.

 

 

그 다랑쉬로 가는 길을

다시 찾았다.

 

 

다행히도

다랑쉬굴로 가는 길은

찾기 좋게

걷기 좋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이곳에 지금과 같은 길이 없었을 때는

다랑쉬굴을 찾아 가는 길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낫으로 가시덤불을 헤치고 억새를 비어가면서

뱀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다랑쉬굴로 가는 길을 내었었는데

이제는 아무 어려움없이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용눈이와 다랑쉬 사잇길. 

 

 

용눈이와 다랑쉬 사이

그 막막한 곶자왈 속

그곳의 좁디좁은 굴

 

 

다랑쉬굴.

 

 

이곳 동부지역의 하도리와 종달리 주민

여자와 어린아이를 포함한 11명의 주민이 이곳 궤에 숨어있었다.

1948년 음력 11월 18일 제주 주둔 9연대는

여순사건을 진압한 대전 2연대와 교체를 앞두고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나섰다.

토벌작전 당시 함덕 주둔 9연대 2대대는 이곳을 발견하고 투항을 권유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수류탄과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고 굴속을 향해 사격을 가하였으며

결국에는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를 불어 넣어 모두 질식사시켰다.

 

 

다랑쉬굴 입구

 

 

묵직한 돌덩어리로 막아놓은 저곳.

 

 

여전히

제주민들의 가슴을 짓누르는 묵직한 돌덩어리.

 

 

오래전과 달리

이곳으로 오는 길도 잘 정비되어 있고

안내판까지 있으나

현장까지 찾아와서도

이 다랑쉬굴의 입구를 찾지 못하는 이들이 이외로 많다.

다랑쉬굴의 입구는 사진에 보이는 것과 같이

새로 세워진 표지판과 옛 표지판 사이의 한 아름도 안되는 돌덩어리 속이다.

 

 

 

옛 표지판.

 

 

 

돌틈의 꽃.

그 꽃 앞에서 마음이 조여든다.

오래도록

이곳에서 피고진 저 꽃들은

그들을 알고 있을까.

 

 

용눈이

 

 

다랑쉬

 

 

다랑쉬굴에서 죽어간 주민들의 유족들은

이곳에서 발견된 유골들을

따뜻한 오름 아래 묻고 싶어했으나

당시 정권하에는 그것마저 어려워

화장한 채 바다에 흩뿌려졌다.

 

 

이곳에 다시 찾아온 3월.

 

 

그리고 이제 곧 4월.

 

 

 

 

새들도

둥지 속에 쉬는데

이 땅에서 떠도는 고혼들은

언제까지 외로워야 하는 걸까.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이제 그만 왜곡된 역사를 청산하고

다시는 이 땅에 권력이라는 총부리가 향하지 않도록

민주의 강한 뿌리를 키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