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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와 3

제66주기 제주북부 예비검속희생자 원혼 합동위령제

by 산드륵 2016.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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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북부 예비검속 희생자 원혼 합동 위령제



예비검속으로 학살당한 이들의 유족들이

6월 25일이면

이곳으로 모인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후방의 민심 교란을 우려한다며

무고한 이들을 미리 검속하여 살해하였다.

제주에서는

제주읍, 서귀포, 모슬포, 성산포 경찰서에서

공무원, 교사, 보도연맹원, 농민, 학생, 부녀자 등

1500여명을 예비검속으로 구금하였다.

그중 제주경찰서 관할지에서는

예비검속된 1000여명이

경찰서 유치장과 주정공장에 분산되어 구금되어 있었는데

7월 16일과 8월 4일에

알몸 차림의 남녀노소 500여명을

트럭으로 날라 배에 실어 먼 바다로 나간 후

바다에 버렸다.

그리고 다시 8월 19일과 20일에는

제주비행장 활주로 옆 구덩이에 

수백명을 몰아넣고 쏘아죽인 후 흙을 덮었다.



그 당시 예비검속으로 학살 당한 이들 중

북부지역 유족들이

이곳에서 제를 올린다.

위령비 뒤쪽

제주비행장 활주로 인근이

바로 학살터이기 때문이다.



2002년 결성된 제주북부예비검속희생자 유족회가

2005년에 이 위령비를 세웠고

2007년과 2008년에

제주국제공항 암매장지에서 유해발굴이 이루어졌으나

당시 유해발굴에서 확인된 이들은

서귀포시에서 예비검속으로 끌려온 사람들이었고

제주북부지역 희생자 유해는 발굴되지 않았다.

아직도

제주국제공항 어딘가에

집단 암매장지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여전히 발굴조사는 요원한 현실이다.



예비검속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져 있는 곳은

제주비행장 암매장 추정지에서 가까운

제주시 용담동 레포츠 공원이다.

레포츠 공원 구석 한쪽에

숨죽여,

숨죽여있는 위령비의 모습은

감당하기 어려운

안타까움으로 밀려와

결국 펜을 들게 만든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기다리며 세운 위령비.



1950년 음력 7월 7일.

집단 암매장의 공포보다

더 큰 아픔. 

부모에게 효도 한 번 못했다는

그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당시 총살 집행을 직접 목격한

허균 제1독립대대 소대장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우리 중대가 제주비행장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제주비행장 벌판에 호를 크게 2개 파고

반도들을 사형 집행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약 200~300여 명 정도가 눈을 가리운 채 총살되었는데

이들을 묻었던 무덤이 나중에 내려앉았던 기억이 납니다.

현장 지휘는 헌병장교인 윤기열이 했습니다.



그날 떠났다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들과 딸.

돌아오지 않는 그들을 기다리는

이 위령비에서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고

해원시킬 그날이

반드시 오길

기원할 따름이다.



용담동 제주북부예비검속희생자 위령비를 참배하고

건입동 주정공장 터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에 있었던 제주 주정 공장은

1934년 일제에 의해 설립되었다.



주정공장 창고가

4.3 당시에는

제주도 최대의 수용소로 활용되었다.



남녀노소, 부상자와 임산부, 귀순자와 피난자 등이 섞여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아이가 태어나기도 했고

쇠좃매의 고문 후유증으로 죽어나가기도 했다.

경찰 특별수사대가 상주했고

청년들은 육지형무소로 이송되었으며

남은 이들 중 대다수는 예비검속으로 집단 희생 당했다.



비극의 땅에

이제 도로확장공사가 진행 중이다.



어딘가에 묻혀있던

그날의 녹슨 기억들.

그 기억들을

온전히 다 드러내는 날

비로소 해원도 상생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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