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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와 3

너븐숭이

by 산드륵 2017.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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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주년 4·3이 다가온다.

4.3 대학살 이후

살아남은 이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북촌리 너븐숭이

 

 

일제저항기에는 항일독립운동이 활발했고

그 동력이

해방공간에서는 주민자치활동으로 이어지며

생동감이 넘쳤던 이곳 북촌 해안마을에서

한날 한시에 3백여명에 가까운 마을사람들이

이승만정권 하의 국군토벌대에 의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학살 당하고

마을이 불태워지며

이후에도 집단총살이 계속되어

오백여명에 가까운 마을사람들이

처참히 희생당했다.

 

 

1949년 1월 17일의 일이었다.

당시 군토벌대는

이곳 너븐숭이와 당팟 등지에서

3백여명의 북촌마을 사람들을 하루종일 쏘아죽였다.

학살 이후 서넉달이 지나서

어른들의 시신은 대부분 다른 곳으로 이장되어갔으나

이곳 너븐숭이에 버려졌던 아이들의 시신은

그대로 묻혀 흙이 되었다.

 

 

그 학살의 시간이

북촌마을 4·3길에

오롯이 살아있다.

 

 

애기무덤

 

 

제주 겨울꽃.

애기무덤 수선화.

 

 

 

예전부터

제주에 수선화가 지천이었던 것은

밤이나 낮이나

그 향기에 취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었던

애비 애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숲의 동백.

하필이면

49년 그해 겨울

수선화 필 때

동백이 지천일 때

참 많이도 죽었다.

 

 

북촌마을 4·3 위령비

 

 

학살 이후

마을에 남자가 없어서

무남촌이라 불렸던 곳.

 

 

인간의 목숨

그 창창한 미래의 가능성을

한순간에 빼앗긴 채

너무도 작은 시간을

살다간

슬픈 영혼 영신님네

 

 

 

그날

바로 옆 북촌초등학교에서

군인들에게 떠밀려왔던 길.

 

 

 

옴팡밭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같이

시체들이 가득 쌓여있던 곳.

 

 

 

당시 북촌마을 주민이었던

김석보씨는 증언한다.

 

 

동생들을 찾기 위해 막 다녔는데

나중에 보니까

저 소낭밭에서 찾았어요.

제일 밑에 동생(5세)은 총 안 맞고 추워서 죽었어요.

둘째 누이동생은 가시덤불 위에 넘어져 있었고

제 밑에 동생은 이마에 총을 맞았어요.

각기 손에 고무신을 다 쥐고.

그렇게 죽어 있었어요.

그래서 너븐숭이에 지금 무덤이 있어요.

 

 

이곳 북촌마을 대학살은

현기영의 순이삼촌이라는 소설로도 알려져

옛 옴팡밭에 순이삼촌 문학비가 들어서 있다.

 

 

제노사이드의 대표적 사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집단대학살의 현장.

 

 

총소리 그치고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기억만 총총히 박혀 있었다.

 

 

 

침묵과 금기와 왜곡의 역사가 흐르던 어느날.

한 6여년이 흘렀다는 어느날.

김아무개라는 마을사람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

상여를 지고 북촌초등학교 앞을 지나다가

그날의 원혼을 잊지 못하던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술이라도 한 잔 드리고 갑주.

그 말 한마디에

대학살의 공포와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와

마을사람들은 모두 주저앉아

아이고 아이고 통곡을 시작했다.

이것이 북촌리 ‘아이고사건’.

이 사건으로 마을주민들은 다시 고통을 당해야 했는데

사진은 당시 북촌리 이장이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쓴 시말서이다.

 

 

 

해안을 밝히던 도대불.

 

 

1915년 세워진 이 도대불의 비석에도

당시의 총탄자국이 남아 있다.

 

 

마을입구 제주목사 선정비에도

역시 총탄자국이 역력하다.

 

 

선정비 뒤쪽이

북촌대학살 당시

가장 많은 인명이 총살당한 당팟.

북촌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동쪽의 당팟과

서쪽의 너븐숭이에서

대학살이 이루어진 것이다.  

 

 

 

마을 한 가운데 북촌성터.

4·3당시

무장대를 막는다는 구실 아래 쌓아졌는데

원래는 마을에서 해안까지 성이 이어져 있었다 한다.

이후에 집을 짓거나 돌담을 쌓기 위해 허물면서

지금과 같이 흔적만 남았다.

 

 

 

북촌마을 4·3길에는

여전히 마을을 지키고 있는 당들이 있다.

둘 곳 없는 마음이 묻혀있는 곳.

차마 다가가지 못하겠다.

 

 

바다를 보고있다.

 

 

 

 

한 공동체가 멜싸지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말이야.

이념적인 건 문제가 아니야.

거기에 왜 붉은 색을 칠하려고 해?

공동체가 무너지고

누이가 능욕당하고

재산이 약탈당하고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친구가 고문당하고

씨멸족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항쟁이란 당연한 거야.

이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서 항복하고 굴복해야 하나?

이길 수 없는 싸움도 싸우는 게 인간이란 거지.

_현기영, 제주작가 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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