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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사찰

하원 법화사

by 산드륵 2023.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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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가 곧 행복인 것들

 

 

물들지 않는 그 성품은 빗속에서도 찬란하다

 

 

안개비 속의 법화사.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는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대정현 기록에는 고려 시승 혜일선사가 남긴 '법화암'이라는 시가 전해진다.

 

법화암가의 경치가 화려하고 그윽해

대나무 솔가지 끌고 휘두르며 홀로 노니네

만일 세상에 상주常住하는 상相을 묻는다면

배꽃은 어지럽게 떨어지고 물은 분탕질하며 흐른다 하리

 

 

고려 시승 혜일은 고려 정언을 지냈던 이영(李穎)의 숙부이다. 경원 출신 이영이 완도에 귀양을 왔을 때 혜일선사가 따라와서 만덕산 백련사를 중수하고 중창하였다. 그 혜일선사는 이후에 완도의 법화암을 노래한 시를 남기기도 했다. 완도의 법화암과 탐라의 법화암. 혜일선사가 머물던 곳은 모두 법화암이라는 사명을 지니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지 사뭇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법화사 구품연지. 법화사 구품연지는 법화사 뒷쪽 수원 '법화수'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낮은 지형으로 모여 이루어진 자연습지이다.

 

 

비가 내리자 숲에 숨어있던 새들이 모두 구품연지로 모여들었다. 구품인은 아미타구품인을 뜻하는 극락에 왕생하는 중생을 9단계로 구분한 것이다. 상품인, 중품인, 하품인을 상중하로 세분하여 9품인이 된다. 9품인은 결국 다른 업력을 지닌 모든 중생을 뜻하는 것으로 그 근기에 따라 다른 방편으로 모두 극락왕생시키겠다는 아미타의 원력을 나타낸 것이다. 익산 미륵사지와 부여 정림사지, 그리고 불국사의 연지 등이 모두 이 법화사의 구품연지처럼 아미타불의 원력인 구품을 형상화하였다.

 

 

법화사 구품연지를 내려다보는 구화루는 건평 54평의 2층 누각 형태로 부석사 무량수전의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2005년 완공되었고 지금은 법화사불교상담대학 강의실로 사용되고 있다.

 

 

구품연지를 건너 도량 안으로 들어서면 고려 원종 10년 1269년부터 고려 충렬왕 5년 1279년 사이에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단행했던 법화사가 드러난다. 법화사의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 시대 장보고의 법화원과 관련하여 창건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으며, 원나라 당시 대대적인 중창 불사가 이루어진 것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전초기지가 필요했던 원나라의 군사적 목적에 의한 것으로도 보고 있다.

 

 

서원이 쌓여 더 깊어지는 법화의 숲.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법화사는 비보사찰로서 사찰에 소속된 노비가 300여명이나 되었다. 법화사에는 원나라 양공이 주조한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이곳의 금동아미타삼존불을 자기들 것이라 하며 가져가려고 사신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명나라에서 탐라의 형세를 파악하고, 탐라를 자국의 영토로 귀속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고 판단한 조선국에서는 급히 김도생과 박모를 시켜 법화사의 불상을 명나라에 전해 주게 하였다.

 

 

대웅전

 

 

대웅전 현판은 소암 현중화 선생의 글씨이다.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봉안하고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좌우협시하였다.

 

 

법화사는 통일신라시대 장보고에 의해 완도 청해진 법화원과 중국 법화원 등과 연계되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가오는 초파일을 맞아 연등이 꽃피는 금당.

 

 

대웅전에 들어서서

대웅전을 나서며

절을 올린다.

당신에게

자성불에게

 

 

대웅전 벽화 양류관세음보살

 

 

파랑새가 노래한다.

심즉불 心卽佛

심즉불 心卽佛

심즉불 心卽佛

 

 

조선 태종 당시 법화사의 아미타삼존불이 중문 세불포구를 통해 반출된 이후에 법화사의 사세는 급격히 무너졌다. 그리고 초가 암자 몇 채로 그 명맥을 유지해왔다. 그러다가 기록에서마저 사라졌다가 근대시기에 이르러 다시 등장하게 된다. 사진은 제주대학교 박물관 조사 과정에서 발굴된 주춧돌과 지대석 등이다. 현재의 대웅전 자리가 옛 대웅전 자리인데 옛 터 위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발견된 13매의 지대석으로 보아 약 105평 규모의 법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라산 남쪽을 대표하는 사찰로서 근대시기에 들어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법화사는 그러나 제주 4.3을 맞아 다시 한번 화마에 휩싸인다. 1948년 음력 10월 법화사는 군경 토벌대에 의해 전소되었고,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1952년 육군 제3숙영지로 접수되어 완파되었다.

 

 

법화사 5층탑

 

 

초전법륜

 

 

제주 4.3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폐허가 된 이곳이 다시 복구되기 시작한 것은 1960대 이후이다. 당시 법화사의 스님들은 법화사 복구를 위해 한라산 영실까지 걸어가서 쓸만한 나무를 구해 오며 직접 대웅전과 요사채를 복원해냈다. 대숲 너머 저곳은 그 시절 그 스님들의 흔적이 배어있는 오래된 요사채이다.

 

 

법화사지 내의 또다른 전각으로 추정되는 곳

 

 

제주대학교 발굴 조사 당시 담장 밖의 폐와무지에서는 '至元六年己巳始'라고 쓰인 명문 기와가 출토되어 이 법화사의 중창 연대를 알려주었다.

 

 

명문기와 외에도 운봉문 암막새, 운룡문 수막새 등 왕실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다수의 기와도 출토되어 이곳의 위상을 반증해 주었다.

 

 

법화사의 오랜 기억 위로 봄비가 세차게 내린다.

 

 

법화수도 힘차게 흐른다.

 

 

이곳이 산남지방 초전법륜의 땅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제주의 역사가 이곳을 관통하여 간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안개비가 더 깊어진다.

 

 

빗방울이 때리니 종소리도 은은하다.

 

 

그 종소리 그 빗소리 모두 잊은 구품연지의 새.

올 때 보았던 그 새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주지스님께서 말씀하신다.

"찰나찰나 새로운 인연이 쌓였을 뿐이라네."

 

 

항상한 것 같으나 무상無常하여 늘 새로운 인연.

그래서 늘 처음이기에

늘 새로운 법화사.

그곳에서는 존재가 곧 행복임을 알기에

모두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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