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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단五賢壇은 제주시 오현길 61 제주성지 길에서 만날 수 있다.

 

오현단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귤림서원이 헐린 이후에, 제주 유림 김희정 등의 건의에 의해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던 오현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제단이다. 오현五賢이라 함은 1520년(중종 15)에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당한 충암 김정, 1534년(중종 29)에 제주목사로 부임해 온 규암 송인수, 1601년(선조 34)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 1614년(광해군 6)에 유배된 동계 정온, 1689년(숙종 15년)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 등을 이른다.

 

오현의 시초는 충암 김정이다. 그는 기묘사화로 인해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후 1576년(선조 9)에 제주판관 조인후 등이 충암이 사사당한 금강사 터에 충암묘冲菴廟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는데, 그 위치는 현재의 오현단에서 동쪽 가락천 너머 100여미터 되는 지점이다. 1666년에는 판관 최남진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 제사지냈다. 이를 시초로 하여 1683년 정온, 김상헌, 이약동, 1678년 송인수를 추가배향하였고, 1682년(숙종 8)에 ‘귤림’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695년 송시열, 이회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 철폐되었고, 1892년에 지방유림이 오현단과 단비를 쌓아 매년 향사를 지내오다가, 1910년부터 중단되었다.

 

 

충암 김정은 1520년에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521년에 사사되었다. 규암 송인수는 제주목사로 좌천된 인물인데 임명된 이후에도 제주도에 입도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청음 김상헌은 안무어사로 제주도에 왔다갔으며 『남사록』을 남겼다. 동계 정온은 약 10여간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였으며 그의 유허비가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초등학교 교정에 남아있다.

 

 

우암 송시열은 83세의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되어 3개월여를 지내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가는 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여기저기 세워진 안내문에 오타가 많다. 제주시에서 오현단 일대에 대한 재정비에 나서야 할 때라고 보인다.

 

 

충암과 면암의 적려유적비. 충암의 적려유허비는 두동강이 나서 버려져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모셔왔는데, 사진 속의 충암적려비는 충암 선생의 16대 종손 김원식, 13대손 김병모, 김기봉 등 후손들에 의해 1979년에 복원된 것이다.

 

 

우암송선생적려유허비.

우암송선생적려유허비는 제주시 칠성로에 있던 그의 적거지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가락천 동쪽 충암 김정이 사사당한 그 자리, 즉 금강사 뜰 안에 버려져 있던 충암김선생적려유허비

충암 김정은 오현단의 모태가 되는 인물이다. 1521년 사사된 이후에 1578년(선조 11)에 이르러 제주목사 임진과 제주 판관 조인후가 충암을 기리기 위해 가락쿳물 동쪽에 충암묘를 세워 봉향하였다. 그리고 다시 1852년 11월에 김정이 살았던 집터에 제주목사 백희수가 ‘충암김선생적려유허비冲菴金先生謫廬遺墟碑’를 세워 봉향하였다. 그러나 두 동강이 나서 버려져 있다가 훗날 이곳으로 옮겨 모시게 된 것이다.

 

 

오현 조두석. 오현을 기리고 제향을 올리기 위한 돌이다. 조인후가 충암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그의 적거지인 금강사에 충암묘를 짓고 제사를 지낸데에서 유래되었으며, 1665년 최진남이 충암사를 이곳으로 옮겨 사詞로 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932년 오현단 조두석앞에서 제를 지낸다음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광풍대. 맑은 날의 바람과 비갠 뒤의 달이라는 뜻의 광풍제월光風霽月에서 유래

 

 

증주벽립曾朱壁立. 증자와 주자가 벽처럼 서있다는 뜻이다. 그 뒤로는 남아있는 제주성지가 보인다.

 

 

귤림서원묘정비. 귤림서원 묘정비廟庭碑는 1850년(철종 1)에 제주목사 장인식이 비문을 지었다. 이 묘정비로 보아 철폐된 귤림서원은 현재의 오현단 기슭 아래쪽인 호남새마을금고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향현사유허비

 

 

노봉김선생흥학비

 

 

유천석. 처마의 낙숫물이 구멍을 뚫은 돌이다. 귤림서원 외삼문 처마 밑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겨왔다.

 

 

장수당은 1660년(현종 1) 제주목사 이회가 진사 김진용의 건의로 세종 때 한성판윤을 지낸 고득종의 옛 집터에 세웠던 강당이다. 1667년(현종 8) 충암사가 장수당 남쪽으로 옮겨지면서 충암사라는 사묘와 장수당이라는 강학을 모두 갖춘 귤림서원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서원철폐 당시 폐쇄되었다가 1875년 제주목사 이희충이 경신재를 지었고, 이후 1910년 제주농업학교가 설립되면서 헐렸다. 현재 장수당은 2003년 복원된 것이다.

 

 

이회목사의 '장수당기'

 

지난 무술년(1658) 봄 제주목이 비자 효종대왕께서는 해외의 창생이 조정의 은택을 입지 못할 것을 깊이 염려하시고, 대신들에게 문관 중에서 택하여 천거하라고 명하시자 대신들은 신臣 회에게 명을 받도록 하였다.

 

나는 같은 해 4월에 고을에 도착하여 성화를 선양하려면 흥학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우선 3읍의 교생을 모아 고강考講하였다. 손수 농사를 짓는 여가를 틈타 사서와 소학을 배워서 음독과 훈석에 통하는 자가 많았는데 그 글 읽는 소리가 맑고 명랑하여 기질이 밝고 뛰어난 자 20명을 뽑아 관에서 책과 양식을 지급하고, 향교 곁에 초가 6칸을 지어서 이들이 머물도록 하였다. 또 일찍이 경서를 읽은 자를 선발하여 훈장으로 삼아 가르치게 하였다. 나 또한 매월 삭망에 직접 그들과 강론하고 그 능부能否를 상벌하였더니,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 분기하여 위태로운 흉년에도 대단한 병고가 없으면 감히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였다. 이와 같이 한 지 2년이 되자 20명 가운데 혹자는 사서일경을 읽고, 혹자는 사서이경을 읽는가 하면, 혹자는 사서삼경을 익히 암송하니, 비록 양남의 선비로서 평소 문학에 종사한 자라 하더라도 이들보다 더 잘할 것이 없었다.

 

토민인 진사 김진용은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식년시에 경전을 강론하여 연획連劃을 받아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기꺼이 벼슬하지 않고 병을 핑계로 스스로 세상을 물리치며 산야에 숨어사는 자이다. 그는 옛사람들의 글을 많이 읽었으므로 임명하여 좌수로 삼았다.

 

내 임기가 만료되어갈 때 김진용이 내게 일러주기를 “사또께서는 부임한 이래로 재생齋生을 불러모아 공부를 권함을 게을리하지 아니하셨으며 여러 유생들 또한 좇아 교화되어 힘써 배워서 문학이 크게 변했으니 덕을 입음이 큽니다. 그러나 단지 이와 같이 해 놓기만 하고 떠나 버리신다면 여러 유생들은 다시 의지할 곳이 없어 모두가 배움을 포기하고 돌아가 농사를 짓게 될 것이니 어찌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자 진용이 말하기를 “성 남쪽에 폐허가 된 집터 하나가 있는데 곧 옛 판윤 고득종이 살던 터입니다. 고판윤의 두 아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헌달하였기에 평소 명당으로 일컫고 있습니다. 만약 이곳에 몇 칸의 집을 지어 장수藏修하는 곳으로 삼고 얼마간의 책과 양식을 마련해 주면 영세불후의 성대한 일이 될 것입니다.”고 일러 주었다.

 

마침내 진용과 함께 가서 살펴보니, 한라산의 정맥이 넘고 빗기며 북으로 달리다가 엉기어 하나의 언덕을 이루었는데, 앞에는 대해大海를 맞아 좌우로 품고 있어 명당이라 일컫는 것도 과연 빈말이 아니었다. 이에 장인을 부르고 재목을 모아 학사 11칸을 짓고 장수지당藏修之堂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동몽 15인을 더 뽑아서 앞서의 20명에 더하니 35명이 되었다.

 

또 본주에는 적곡 3분모가 있는 외에 또 300곡의 모곡을 모아 기록하는 일이 있으니 다른 고을에는 없는 것이었다. 그 연유를 갖추어 감해 줄 것을 계문啓)하여 거학巨學하는 양식으로 삼았다. 또 부족할 것이 염려되어 콩 150곡, 밭벼 50곡, 보리 50곡, 목면 2동을 변통하여 지급하고, 배 1척을 정기적으로 지급하여 육지에 나아가 계속하여 양식을 사 옮기게 하되 유사 2명을 뽑아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창시의 본말을 간략하게 기록한다. 경자년(1660) 4월 목사 이회가 기록하다.

 

 

복원된 귤림서원

 

 

1667년 제주판관 최진남이 충암묘를 이건하면서 ‘사祠’와 ‘재齋’의 기능을 갖춘 서원으로 발전했고, 1682년 숙종은 예조정랑 안건지를 제주로 보내 사액서원으로 지정하고 ‘귤림’이라는 현판을 하사했다.

 

 

귤림서원의 원래 위치는 묘정비 아래쪽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1호라고 하면서 복원 문제에는 영 관심없는 제주시정이 안타까울 뿐이다.

 

 

향현사

 

 

1843년(헌종 9) 제주목사 이원조가 고득종을 봉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이후에는 김진용도 향현사에 병향되었다.

 

 

충암 김정에서 오현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몇 세대에 걸친 추억이 남아있는 곳

 

 

귤림서원 저편의 가락쿳물도 매립되어 사라졌고, 100미터 저 편이라는 충암의 적거지, 금강사도 기억 속에서 매립되었다. 흐르는 것들 사이에서 붙들고 있을 것이 있기나 한 것인가. 다만 소요逍遙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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