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 경판 탐라 제작에에 관한 소견
스님께서 제주소식에 올렸던 글입니다.
앞글 묘련사 관련 기록에 대한 해석입니다~
서귀포 신문을 비롯한 여러 신문을 보면
이 판각이 대몽항전의 의미로 파악하는데
이미 원의 지배기이고 저항운동의 하나였다는 것을 증명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송광사가 고려불교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시기이다.
또한 송광사에는 이 시기에 판각된 원과 티벳 불교의 경판이 많다. 그래서 몇 해 전에 이에 대한 학술 세미나를 연적이 있다.
나아가 이 시기 특히 제주에서 원에 저항했다는 어떠한 징후도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해인사 판과 연결시켜 그 제작 동기의 의미를 찾으려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그 보다는 제주도에서도 판각되었다는데 의미는,
또한 송광사의 경판제작을 재료(통나무)를 옮기지 않고 제주에서 판각했다는 것은,
1. 그동안에 원의 지배기에 제주불교가 융성해졌다는 주장을 뒤집을 수 있게 되었다. 즉 제작 기간을 감안할 때 원 지배기 이전에 이미 제주불교가 상당한 세와 높은 제작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판재료 준비과정이 복잡하고 판각기술이 당시로서는 최고의 문화적 인쇄술이었음은 주시의 사실이다.
2. 1296년 판이라면 해인사 팔만대장경(1237-48년 제조)보다 48년 뒤의 일이다. 또 경판의 재료를 얻기 위해서는 5-7년이 걸리며 판각의 재작 기간까지 고려한다면 10여년은 족히 걸리는 만큼 30여년 밖에 시기적 차이를 갖고 있지 않다. 이는 육지부의 문물과 제주의 사정이 시․공간적으로 그리 동떨어져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 주도가 불교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물론이다.
경판 재료로 자작, 돌배, 산 벚나무 외 10여종의 나무를 사용하는데, 그 제작과정이 복잡하고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진다. 벌채를 하여 1-2년간 진을 충분히 뺀 후(건조가 잘못되면 나무가 비틀어짐) 소금물에 1-2년간 담근 후, 다시 가건물에서 직사광선을 피해 1년간 건조하여 면밀히 살핀 후 하자가 없는 것을 선택하여 경판재료로 씀.
3. 송광사 경판 제작을 지원하였다는 것은 이미 제주불교가 육지부의 사찰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묘련사 경판제작에 폭포사의 안립선사가 주도하였다는 것은 묘련사 이외에도 크고 작은 규모의 경판제작이 도내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하게 한다.
4. 묘련사의 사자가 사(寺)가 아닌 사(社)로 나와 있다는 것은 고려 말기 불교정화 운동이 제주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한다. 이 시기는 경판을 소장하고 있는 송광사(수선사)에서 보조국사가 정혜결사운동을 시작한 이후 제자들에 의해 계속 진행되었던 기간이다. 또한 팔공산 거조사(居祖社), 수선사(修禪社), 정혜사(定慧社), 강진의 백련사(白蓮社) 등이 모두 결사와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여러 정황들로 볼 때 제주에서도 결사운동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寺)가 아닌 사(社)를 쓰고 있지 않나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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