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피는 따뜻합니다.
제주 사람의 피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하얀 시골꽃
그 접시꽃처럼 순박하기도 하고
붉은 시골꽃
그 접시꽃처럼 열정적이기도 했던 옛 제주 사람들의 삶
그러나 제주의 시골길에서 만난 접시꽃은
피빛처럼 붉은 자국이 더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직 4.3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다 죽어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때까지는
제주에서 만나는 붉은 꽃들에게서
피빛의 영상을 다 지워버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한림읍의 고림동으로 가는 길입니다.
평범해 보이기만 하는 이 마을에도
4.3은 어김없이 긴 흉터로 남아 있었습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
한라산 중허리 오름에서 봉화가 붉게 타오르며 시작된 4.3!
일제강점기 갖은 수탈에
해방전후기 갖은 약탈에
제주섬에 남은 건 오랜 돌림병과 실직난과 보리 한 톨도 아쉬운 가난과 궁핍
그리고 관리들의 지독한 유린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보는것처럼 그때도 지금도 생소하다고 밖에 더는 표현할 수 없는 학살터!
학살터입니다.
옛 한림 오일장 뒤편 학살터
4.3 발생 이후 토벌대의 진압 작전은
제주 사람을 빗자루로 쓸어내리듯 쓸어내려 모두 없애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조장하여
해방전후사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던 이승만 정권의 정치도박에
제주 백성들의 목숨이 블랙칩처럼 쓰였던 것입니다.
그날 이 학살터에는
고림동 마을 주민은 물론 모슬포 및 제주시에서 잡혀온 사람들까지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날 토벌대는 명령하였습니다.
지목하라!
산으로 도피하여 무장대로 활동하는 자의 가족이 이 중에 있는지 지목하라!
지목하지 않으면 너가 죽는다.
이 말에 살고 싶었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눈을 감고 아무나 지목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사병으로 이용했던
대통령의 권세를 등에 업고 제주에서 갖은 만행을 저질렀던
서북청년단원들은 갈중이로 갈아 입고 제주 사람인 양 그들 틈에 섞여 앉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는 바보같은 백성들은 그 낯선 서북청년단원만 지목하다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총알 세례를 듬뿍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몰랐습니다.
그냥 이런 세상 이렇게 사는 건가 했습니다.
토벌대는 고림동 마을 주민들을 대량 학살한 이후
무장대로부터 마을을 보호한다며 남은 주민들에게 성을 쌓도록 지시합니다.
위 고림동 성은
1949년 5월까지 고림동 주민은 물론 인근의 금악, 명월 주민들까지 동원하여 쌓은 성입니다.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보호할 것인지는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죽고
삼촌이 죽고
다 죽어더는 보호할 것도 없었지만
나라가 하는 일이라니까 밤낮으로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은 웃습니다.
그때를 말하며 분노할 만도 한데 지금은 웃습니다.
우리 백성은 이러하였습니다.
하얀 접시꽃같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두 잊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제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갔다고 합니다.
맞는 말 같습니다.
이데올로기보다 돈에 목숨거는 세상이 되었으니까요
이데올로기는 갔습니다.
그러면 다 된 것일까요?
때가 되면 어김없이 수국은 핍니다.
1948년 그 당시에도 저 수국은 저리 곱게 피었을까요?
2006년 지금 피는 수국은 그저 관광객 유치라는 경제 가치밖에 없을까요?
사람의 피는 뜨겁습니다.
중산간 농민의 피도 뜨겁습니다.
무장대의 피도,
토벌대의 피도,
서북청년단원의 피도 뜨겁습니다.
그러나 꽃은 단지 피고 집니다.
뜨겁지 않아서일까요?
정말 그럴까요?
고림동 인근 마을 장원동입니다.
이 마을 역시 옛 제주의 산간마을이 그러했던 것처럼
물로 인한 고충이 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 장원택씨가 자신 소유의 밭에서 나는 물을
마을 사람들을 위해 희사하면서 물로 인한 고충을 덜어 주게 되었습니다.
이 고아니못이 바로 그곳입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그의 공덕을 기리어 비석까지 세우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장원동에 포함되었었지만
지금은 행정구역상 강구리로 명명되는 이곳 역시
4.3의 바람을 피해가지 못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1945년까지 약 15호 정도가 거주하던 이 마을은 4.3으로 완전 폐허가 됩니다.
위 성은 1949년에서 1950년 사이 해안부락으로 소개되었던 마을 주민들이 다시 돌아오면서
토벌대의 명령으로 쌓은 성입니다.
밭주인도 최근까지 저 성의 의미를 몰랐답니다.
가족묘지를 조성하면서 성의 돌을 일부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이 성의 아픈 역사를 알았다면 차마 그럴 수 없었을 텐데 하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이곳은 인근 문수동의 성입니다.
4.3 당시 이 성을 쌓아올렸던 이들은
대부분 여성과 어린 아이들이었답니다.
이유는 더이상 말씀드리지 않아도 다들 아시지요?
특히 이곳 문수동은 물이 좋기로 유명해서
옛날에는 아주 먼 저지리에서까지 이 물을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새벽길을 걸어오는 것이 예사였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저 건너편 4.3 성과 이 물동 바로 앞으로 도로가 개설되면서
물길도 끊어져 버렸답니다.
문수천이라는 옛 비석만이
이곳의 추억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생각나십니까?
쇠솥 뚜껑 엎어놓고 보리볶던 할머니.
할머니 옆에서 쇠똥, 솔똥, 보리짚으로 불을 때며 연기만 컥컥 들이마시던
어린 손자 손녀들은 이제 이만큼 컸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우리는 미처 그 어른들이 헤쳐온 세월이 어떤 것이었는지
미처 헤아려 볼 생각을 못합니다.
그래서일까요?
할머니는 그립지만 할머니의 삶은 기억하지 못하는 이 못난이
오랫만에 대한 개역(미숫가루) 앞에서그만 컥컥 목이 메이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