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산사람...
한라의 산사람...
그들의 최후는...
차라리 붉은 단풍 빛...
한라의 산사람
그중에서도 1948년 4.3 당시 한라산 유격대 총사령관이었던
이덕구의 산전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이덕구 산전을 찾기 위해서는 제1횡단도로에서 교래리 방면으로 가다가
물찻오름으로 오르는 임업도로로 빠진 후 약 1.5km 정도를 더 가면
사진과 같은 계곡 옆 오솔길을 발견하면 됩니다.
이 길에는 입구에서부터 노란 표식이 되어있는 나무들이 있는데
이는 어느 가문의 후손들이 성묘길을 잃지 않기 위해 해 놓은 표식들입니다.
깊은 숲 속의 이덕구 산전을 찾기 위해서는 이 노란 표식 끝의 무덤까지 잘 찾아가셔야 합니다.
표식만을 쫓아 약 500여 미터를 걸어 계곡을 건너면
시간은 19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계곡 위에 보이는이 무덤의 바로 왼편이 이덕구 산전 일대입니다.
'북받친밧'이라 불리는 이곳은 1949년 2월 4일 동부8리 대토벌을 계기로
제주시 봉개리의 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하고
봉개리에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던 봉개리 주민들이 은신해 살던 곳이었습니다.
이곳에 1949년 봄 이후에 무장대 사령부인 이덕구 부대가 잠시 주둔하여 최후의 항전을 벌이면서
'이덕구산전(山田)'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4.3 당시에는 볼 수 없었던 나무들이 자라 깊은 숲을 이룬 탓에
여기서부터는 저 빨간 표식을 쫓아 가는 편이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이 됩니다.
사진에 보이는 것은 초소였지 않았나 추측됩니다.
이덕구 부대가 머물렀던산전 곳곳에는
아직도옛 사람들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습니다.
깨어진 항아리
꿈은 그렇게 깨어집니다.
깨어진 솥
삶도 그렇게 깨어집니다.
움막을 지었을 집터
조그만 움막 안에서 오돌오돌 떨었을 가여운 이들
그들 중 누구는 살아남아 지금은 어디서 그 시절을 잊고 잘 살고 계신지...
한라는 이처럼
한라는 이렇게
한라는 이토록 아름다운데
한라의 산사람.
달리기를 잘하던 조천중학원 역사선생님 이덕구는 이렇게 갔군요.
1949년 6월 7일 경찰에 의해 나무에 꿰어져 산을 내려온 이덕구
다음날인 6월 8일에는 관덕정 앞마당에서 형틀에 묶인 모습으로 전시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남루한 웃옷 주머니에는 숟가락 하나가 꽂혀 있었는데
이는 산에서 늘상 가지고 가지던 그의 무기였나요?
제주의 장두 이재수가 그러했듯이
반란의 책임자는 곧 목이 잘려 관덕정 앞 전봇대에 다시 내걸리게 됩니다.
제주를 점령했던 미국은 FTA로 다시 제주를 찾고
이제 저 곳엔 역사를 잃지 않으려는 이들의 안간힘만 간신히 세월을 붙들고 있습니다.
악보를 따라 노래하며 담배 한 대 공양하고 내려오는 길
마을로 돌아오지 못하고 다시 숲으로 난 길을 걷습니다.
이덕구 산전에서 나와 임업도로를 따라 걸으면
굼부리가 아름다운 물찻오름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오름의 정상에는 초록의 숲과 구별되지 않는 초록의 물이 가득 고였군요.
물찻오름이 물에 잠겼습니다.
오름 정상의 둘레가 잣성을 닮았다 하여 물찻오름이라 불린답니다.
구름 위로 나뭇잎이 흘러갑니다.
흐르면서도 구름이나 나뭇잎은 자취를 남기지 않습니다.
다만 가을로 인하여 흔들리는 저 물색처럼
내 마음에만 산사람의 자취가 오래 지워지지 않은 채
잔잔한 동심원을 그리며 맴돌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