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셋방 얻어 놓고 별을 보며 산다.
누구나 한번쯤 꿈꾸어 보았을만한 낭만.
제주는 요즘 그런 낭만의 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오늘은 음력 7월 7일 견우성과 직녀성을 찾아보는 날입니다.
그러나 또한 오늘은 제주섬의 어느 한 귀퉁이에서
숱한 영혼들이 별이 되지도 못하고 산산히 부서져간 날이기도 합니다.
해마다 음력 7월 7일 사계리 백조일손지묘와 한림읍 금악리 만벵디 공동묘지에서
합동 위령제가 열리는 이 날.
추모의 마음으로 지난 4월 다녀온 섯알오름 학살터를 회상합니다.
사계리 백조일손지묘.
1950년 8월 20일 음력 7월 7일 칠석날 새벽 5시경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한꺼번에 학살당한 무고한 양민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곳입니다.
서로 다른 132분의 조상이 한 날, 한 시, 한 곳에서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되었으니
그 후손은 이제 모두 한 자손이다하여 백조일손지묘라 불립니다.
해방 전후사의 제주 역사를 증언하는 또 한 곳
제9연대본부 옛터의 입구입니다.
이 9연대는 1946년 창설된 이후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4.3항쟁 당시 토벌대 본부 역할을 합니다.
모슬포와 사계리 접경지역에서 모슬봉 쪽으로 보면 길옆에 있습니다.
옛 9연대본부였던 자리에
현재 해병대 부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비군 교육장소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백조일손 묘역에서 섯알오름 학살터로 향합니다.
섯알오름 주변에는
일제말기 일본군이 만든 비행장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옛 관제탑의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송악산 앞으로 일본군 비행기 격납고가 널려 있습니다.
저 흉물스러움까지도 껴안아야 하는 게 우리의 역사입니다.
격납고의 들판을 벗어나니 섯알오름이 보입니다.
오름의 벌건 살점에 벌써부터 가슴이 콱 막힙니다.
섯알오름 학살터입니다.
이곳은 옛 일본군 탄약고 터였습니다.
엄청 큰 구덩이인데 사진에서는 너른 평지처럼 보입니다.
사진 가운데 조그만 나무 표지석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시면
결코 만만한 크기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계엄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1950년 칠석날 새벽 2시경 한림 인근지역 주민 63명과
새벽 5시경 서부지역 예비검속자 132명이 한꺼번에 학살당하였습니다.
예비검속!
사상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미리 검거했다는 말인가요?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생각납니다.
미래에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 추측되는 자들을 찾아 죽이는 영화였나요.
일본군 탄약고는 미군정 시대 미군이 폭파시켰는데
저 철근 구조물들은 아직도 제대로 풀리지 않는 역사만큼이나 서로 엉겨 있습니다.
1950년 칠석날의 아픔은 섯알오름에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한림읍 명월리의 갯거리오름.
일명 개꼬리오름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에도
섯알오름에서 학살당한 한림 지역 희생자들의 묘역이 있습니다.
갯거리오름 서남쪽 만벵디 묘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어두컴컴한 소나무 숲을 통과하면 '넓은 곳' 만벵디가 나타납니다.
섯알오름에서 학살된 후 고향의 만벵디로 돌아와 묻힌 분들의 묘역이 있습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한림읍 금악리의 만벵디 묘역입니다.
당시 칠석날 한림 인근 주민들 63명이 새벽 2시경 먼저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총살되고
대정 인근 주민들은 트럭이 고장나는 바람에 그보다 늦은 새벽 5시경 학살되었습니다.
학살이후 6년동안 섯알오름 학살터에 버려져 있다가
1956년 유족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이곳 고향 가까운 곳으로 이장되었고
현재는 46위의 영령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오늘은 칠월 칠석입니다.
뉴스에서는 두 묘역에서의 합동위령제 사진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레바논에서는 37명의 어린 생명들이 포탄처럼 흩어져 버린 사진이 전송되어 옵니다.
역사의 진실이 꼭 규명되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듯
슬픈 두 개의 그림이 겹쳐지는 칠월 칠석의 밤도 이미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역사는 때로는 우회하거나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고
권력에 의해 우리의 무지에 의해 진실이 가리워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단지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역사는 제 갈 길을 가고 있고 거기에 역사의 진실성이 있다." - 강만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