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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사찰

토산 영천사

by 산드륵 2008.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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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웅큼 세월이 빠져 나갑니다.

그것은

산으로 난 길에서

저절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겨울비 내린 산길에서는

마음이 먼저 무채색으로 변해가지만

알록달록 고운 우산 있어

쓸쓸하지 않은 길.

 

오늘은

그 우산 하나 벗 삼아

제동 목장 사이로 난 길을 거쳐

토산리 영천사에 다녀왔습니다. 

 

제동 목장에서 빠져나와

정석 항공관을 조금 지나치자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생각지도 않게 앞을 가로막습니다.

 

'헹기머체'

 

반구형으로 지표면에 솟아나와 있는

이 용암 덩어리는

오름 내부에서 마그마가 관입된 것으로

인근의 '꽃머체'와 더불어

우리 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분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지하 용암돔이

헹기머체라고 불리는 까닭은

바위 위에 헹기물이 있었기 때문인데

헹기물이란 놋그릇에 담긴 물을,

머체란 돌무더기를 뜻하는 제주방언입니다.


거북등과 같은

불규칙한 표면절리가 잘 발달된 이 지하 용암돔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것으로

인근에 위치한 큰사스미 오름의 화산 활동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겨울비가 쉬어갑니다.

가야할 곳에

다다른 까닭입니다.

토산리 영천사

 


나그네의 번뇌망상은

이곳에서 베어내 버립니다.


영천사 전경.

 

이곳은 1934년 2월 23일

김종화 스님이

월정사를 창건한 이후 뒤이어 세운 사찰로서

당시의 사찰명은 봉주사였습니다.

 

김종화 스님의 속명은 석윤.

제주 항일 의병을 이끌었던

바로 그 김석윤 스님을 말합니다.


절 입구의 연지


연꽃은 이미 시들었지만

수련 몇 송이는

나그네를 기다려 주었습니다.

현재 영천사의 대웅전 전경입니다.

김석윤 스님이 세웠던 옛 초가 대웅전은

현재의 대웅전 바로 옆에 위치한

요사채 자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댕 댕

새벽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종각

 

그러나 이곳에서

먼동과 함께 

그 종소리가 울려 퍼졌던 것은

아마 석윤 스님이 오시기 훨씬 이전의 일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종각 뒤편 과수원은

'절래왓 가름'이라 불리는 곳으로

고려 시대 옛 사찰이 존재했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영천사 도량 안에 가득핀 노란 장미꽃

 

부처님께 공양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아름다운 얼굴입니다.


대웅전 안의 부처님과 보살님

 

창건 당시의 불상과 탱화는

1948년 제주 4.3 사건으로

사찰 건물 일체가 철거되기 전에

인근 대나무 밭에 움막을 만들어 숨겨두었으나

모두 소실되고

현재 전해지는 것은 없습니다. 


현재의 탱화는

최초의 봉주사에서 봉림사로

그리고 오늘날의 영천사로 거듭나면서

새로 모셔진 것입니다.


세월과 더불어

그리고 제주 4.3과 더불어

김석윤 스님의 자취는 사라졌지만

이 공덕비에

한 줄 비문이 되어 남아있기는 합니다.

 

물줄기가 많이 줄었다는

절 입구의 노단샘

 

서귀포시의 지장샘 전설과

똑같은 전설을 간직한 샘물입니다.

 

석윤스님이 이 사찰을 창건할 당시에는

이곳에서 샘물을 두 손으로 받아 마시고

얼굴도 씻으시고 그러셨겠지요.



일제 강점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독립운동가이자 출가 사문 김석윤 스님의 행적은

여전히 베일 속에 가려져 있지만

그 분을 기리기 위한 노력은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닌가 봅니다.

 

영천사에서는

더 늦기 전에

김석윤 스님의 행적을 조사하여

사진 속 저곳에 그 분을 기리는 비석을 세울 예정이라고 합니다. 


오래 도량을 지키는

저 꽃처럼

님의 고운 뜻이

잘 새겨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토산리의 영천사를 나와

표선 백사장을 찾았습니다.

 

48년 12월 12일

봉주사가 철거된 이후

토산리 주민들이

토벌대에 의해 대거 학살 당한 곳입니다.

당시 토산리는 2백 가호의 작은 마을이었는데

희생자는 223명에 달했습니다.

 

고통스런 곳.

외면하고 싶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넘어갑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우리들이 해야 하는

최소한의 참회.

그것일지도 모르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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