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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오백 당오백(폐사지)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by 산드륵 2022.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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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도순동 산 1번지

 

 

탐라인들의 기도는 한라에서 내려와 영실에서 맺힌다.

기도는 물길을 따라 간다.

상원上院이라 불리던 그 영실 계곡을 지나 사람들이 사는 하원으로 가는 길에 도순천, 고지천이 있다.

그리고 그 도순천과 고지천이 쉬어가는 중원中院이 법정이악 법정사 일대이다.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은 1918년 10월 7일 일어났다.

그날 이 계곡에는 가을이 그저 서성이고 있었다.

산들바람이 좋았다.

 

 

1911년 한라산 남쪽 지역을 대표하여 안봉려관, 김석윤 등 근대시기 제주불교계 인사들의 노력으로 다시 일어선 중원의

법정사.

그 법정사의 옛이름은 법돌암이다.

그곳에 관음사의 강창규, 방동화 스님은 물론, 동학농민운동 당시 민중과 함께 했던 김연일 등의 의병 출신 승려들이 가세하여 들어오면서 명실상부 제주 항일 운동의 본산이 되었다.

 

 

이곳 중원에서 거사를 일으킨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주역들은 산길과 물길을 따라 도순리, 하원리, 월평리, 영남리 등의 길로 하산하며 인근 주민들과 하나가 되어 결국 700명이 동참하는 항일운동으로 승화시켰다.

 

 

그러나 총칼은 그들을 관통했다.

법돌암은 불태워졌다.

참여자들은 목포지청 검사분국으로 이송되어 단 한차례의 판결로 형량을 구형받았다.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은 기미년 3.1운동보다도 앞선 항일운동으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지만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다.

 

 

그 길을 걷는다.

 

 

가을은 아나키스트

 

 

이곳에서 불태워져버린 뜨거운 열정도 그 가을로 돌아간다.

 

 

현재 서귀포시가 지정한 무오법정사항쟁지 일대와 그 주변에는 최소한 4·5군데의 법돌암 관련 건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법돌암에 상주하던 스님만도 7~8명이 넘었기 때문에 법당을 비롯한 요사채와 산신각 및 기도터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1918년 조선 국토 침탈 목적으로 일제가 작성한 『조선오만분일지형도』에 의하면 도순천과 고지천 쪽으로 5개의 건물 표시가 보인다.

 

 

그중에 첫번째 건물로 추정되는 곳은 현재의 법정사이다.

김종철은 『오름나그네』에서 계곡 쪽의 평평한 빈터에서 발굴된 주춧돌로 보이는 돌 2개가 이곳으로 옮겨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이틀 방문했으나 문이 잠겨있어 들어가 볼 수 없었던 비각.

오래전 이곳에 참배했던 기억은 파편처럼 부서져 복원되지 않는다.

다음 인연을 기다려 찾아가볼 생각이다.

 

 

법정사 도량 안에는 여기저기 유물들이 많이 흩어져 있다.

관리가 시급하지만 서귀포시청에서도 손을 쓸 수가 없는 사정이 있나보다.

 

 

샘물

 

 

경사진 비탈을 정리하여 위 아래로 요사채와 비각을 이어놨고 그 중간에 법당이 들어섰다.

 

 

법정사 석가모니불과 좌우 협시보살

 

 

이곳에 또 어떤 기억이 묻혀 있을까

 

 

산길을 따라 의열사 쪽으로 걸어간다.

이 일대에도 법돌암 관련 건물들이 있었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가뭄에도 불구하고 이곳 인근 계곡의 수량은 여전히 풍부하다.

 

 

대성굴

 

 

산신기도터.

이곳 중원에는 계곡을 따라 계속해서 기도터가 이어진다.

 

 

보이는 곳이 모두 기도터이다.

 

 

이곳이 수행자들이 걷던 중원임을 실감하게 한다.

 

 

여기는 기단이 3단으로 쌓여있다. 돌과 시멘트가 섞여있어 근대시기까지 계속해서 이용되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법돌암의 또다른 건물지.

현재 이곳이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로 지정이 되어 있다.

 

 

샘물

 

 

건물터

 

 

절집을 지어본 지인이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법당터일 가능성이 있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곳에 있던 여러 유물들은 오래동안 버려져 있었다.

 

 

공양간으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숯을 비롯하여 자기편과 항아리 조각도 보인다.

법돌암이 일제에 의해 불태워지고 출입금지 지역이 되었지만, 그후 근대시기로 넘어오면서 산신기도를 위해 드나드는 분들에 의해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인근 법정사 보살님이 살아계셨을 때 몇몇 유물을 옮겨갔다는 말씀을 직접 들은 적은 있지만 이미 90년대의 기억이다.

녹음기라도 들고다녔으면 그 음성을 다시 확인할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계곡에는 절구처럼 생긴 자연석이 있어서 법돌암 스님들이 그곳에서 쌀가루를 내어 떡을 만들고 부처님께 공양올렸다고 말씀해 주셨던 방진주 스님.

이제는 방스님도 열반에 드셨고 절구돌마저 사라진 자리에 낙엽들만 떠있다.

가장 가벼운 것이 가장 무겁던 그 시절을 위로한다.

그래서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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