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로부터 명석한 이들이 많이 난다던 대정고을을 찾았다. 어느 집 시멘트 벽에 그려진 대정현성 지도는 이 고을의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잘 보여준다.

대정성지. 천천히 걸으면 대정성지는 아름답다. 오래 걸으면 더 아름답다. 동문으로 들어서면 추사를 만나고, 북문에 오르면 한라와 산방산, 단산이 반기며, 서문까지 가지 않더라도 보성초등학교에서 동계 정온을 비롯한 옛 어른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향청을 지나치면 제주의 장두 이재수가 나그네의 발길을 붙든다. 오래 붙든다.

대정성지는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이다. 조선 태종 16년인 1416년에 제주도의 행정 구역 정비로 대정현이 설치되고 난 후 2년 뒤에 대정현감 유신이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읍성을 축조했다. 이 읍성은 산과 계곡을 끼고 있는 일반적인 읍성과는 달리 집과 밭들 사이에 만들어져 있다.
동문밖에는 삼의사비와 돌하르방들이 모여 있고, 성안으로 들어서면 수선화와 추사적거지와 흑룡장성이라는 돌담길이 한없이 이어진다. 보성초등학교에 들러 대정골의 여러 공덕비를 만나고 나오면 두레물 옆에서 이재수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이형상의 탐라순력도 대정조점에 대정성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성벽의 둘레는 약 1614m이고, 높이는 약 5.1m이다. 지금은 성벽 안에서 군데군데 옛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성문은 동·서·남문 3개만 설치되고 북문은 처음부터 만들지 않았다. 이곳을 중심으로 관아와 창고들이 있었으며, 이 지역 방어를 위하여 10여 곳에 봉수대를 설치해 먼 곳에 외적의 침입을 알렸다.

대정현성과 수선화

추사 김정희 유배지와 수선화


추사선생적려유허비. 추사의 향기는 제주수선화를 닮았다. 줄기는 짧고 겹꽃 대여섯개가 한꺼번에 달리는 제주수선화의 향기에 빠지면 결코 그 향기로부터 헤어나기가 쉽지 않다.

수선화/추사 김정희
一點冬心朶朶圓
品於幽澹冷雋邊
梅高猶未離庭砌
淸水眞看解脫仙
점 하나 찍은 듯 겨울의 마음이 송이마다 동그랗다
그윽하여라 담담하여라 성품은 차갑게 빼어나네
매화는 고고하여도 뜨락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맑은 수선화는 참으로 해탈한 신선을 보는듯하구나

추사는 유배 초기 1840년에 송계순의 집에 위리안치되어 있다가 1842년경 강도순의 집 모거리로 거처를 옮겼다. 추사는 이곳을 귤중옥橘中屋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현재의 추사적거지는 1948년 4·3 사건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을 통해 복원한 것이다.
이곳에 초의선사가 찾아왔다. 추사와 초의의 금란지교는 겨울에 만나는 수선화와 같았다. 수선화를 바라보며 마시는 한 잔 차와 같았다. 그 둘은 서른살 즈음에 만났다. 둘은 동갑이었다.

오래된 성에서 만나는 것들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제 성품을 잊지 않고 있는 것들

성 위에 올라서면 저기 한라

성담 끝으로 산방산과 단산


보성초등학교 안의 동계정온유허비

동계 정온은 1614년부터 1623년까지 대정현 동문 안에 위리안치되어 있었다. 이후 추사 김정희의 건의에 의해 1842년 헌종 8년에 제주목사 이원조가 대정현성 동문 밖에 ‘정온 유허비’를 세웠는데 1963년에 옛 대정현의 객사가 있던 보성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졌다.

사상백공희수거사비使相白公希洙去思碑. 위 비석은 박희수목사의 선정善政을 기려 상모, 하모, 영락, 신평, 일과리 등 5개 마을 백성들이 세운 비碑이다.

재일동포 등의 선행을 적은 20여 기의 비석들

객사터의 유물들까지 모든 것이 정겹다.

두레물과 이재수 생가터 표지석. 이재수 생가터는 우물 바로 앞집이다. 소유주의 허락없이 출입이 불가해서 사진은 찍지 않았다.

유력한 명관이 추대되면 물이 말랐다가도 용출하고 만약에 그렇지 못한 이가 추대되면 용출되던 물이라도 금시 말라붙어버렸다고 적혀있다.

신축항쟁은 1901년 카톨릭교회와 그들을 앞세운 봉세관들이 제주도민들을 수탈하자, 이에 이재수를 비롯한 제주도민들이 이에 저항해 맞선 민중항쟁이다. 19세기말 제주도에서 선교를 시작한 프랑스 신부들에게는 고종 임금이 발급한 '여아대如我待'가 있었는데, 이는 '나를 대하듯 하라'는 특권이었다. 이 특권으로 그들은 살인, 강간, 토착신당 파괴, 경제독점 등 온갖 범죄를 저질렀고 이에 봉세관 강봉헌이 민포 징수 및 가옥세, 수목세, 가축세, 어장세, 어망세, 염분세, 노위세, 잡초세 등의 온갖 잡세까지 징수하며 도민의 분노를 일으켰다. 이에 저항하여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 등이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천주교인 3백여명이 희생되었으며 결국 이재수 등은 처형되었다.

신축항쟁 120주년 기념사업회에서는 이곳 이재수 생가터뿐만 아니라, 신평리에 소재한 이재수의 어머니 묘지 옆에도 비를 세우는 등 신축항쟁의 의미를 왜곡하는 역사학자들에 대해 다시 저항의 길을 나서고 있다.

수선화 향기같은 대정고을

이 고을을 사랑하는 청년들의 마음은 시대를 건너 건너도 늘 변함이 없다.

대정고을 돌하르방 위치도

원래의 위치에서 벗어나 여기저기로 이설 정비된 상태이다. 옛 자리로 돌아가도 좋으련만 무엇이 그리 어려운가.

향청 앞 객사터였던 보성초등학교 입구에 있던 돌하르방들이 지금은 동문 밖에 모여있다.

제주대정삼의사비.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등 삼의사三義士의 뜻을 기리는 비석이다.

1997년 4월 20일 대정고을연합청년회 세웠다.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식이 될 것이다. 1899년 濟州에 포교를 시작한 天主敎는 당시 국제적 세력이 우세했던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그때까지 민간신앙에 의지해 살아왔던 도민의 정서를 무시한 데다 봉세관과 심지어 무뢰배들까지 합세하여 그 폐단이 심하였다. 신당의 신목을 베어내고 제사를 금했으며 심지어 私刑을 멋대로 하여 성소 경내에서 사람이 죽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에 大靜 고을을 중심으로 일어난 도민 세력인 商務會는 이 같은 상황을 진정하기 위하여 城內로 가던 중 지금의 翰林邑인 明月鎭에서 주장인 吳大鉉이 천주교 측에 체포됨으로 그 뜻마저 좌절되고 만다. 이에 분기한 李在守, 姜遇伯 등은 2진으로 나누어 성을 돌며 민병을 규합하고 교도들을 붙잡으니 민란으로 치닫게 된 경위가 이러했다. 규합한 민병 수천 명이 제주시 외곽 黃蛇平에 집결하여 수차례 접전 끝에 제주성을 함락하니 1901년 5월 28일의 일이었따. 이미 입은 피해와 억울함으로 분노한 민병들은 觀德亭 마당에서 천주교도 수백 명을 살상하니 무리한 포교가 빚은 큰 비극이었다. 천주교 측의 제보로 프랑스 함대가 출동하였으며, 조선 조정에서도 察理御使 黃耆淵이 이끄는 군대가 진입해와 난은 진압되고 세 장두는 붙잡혀 압송되어 재판과정을 거친 후에 처형되었다. 장두들은 끝까지 의연하게 제주 남아의 기개를 보였으며, 그들의 시신은 서울 靑坡洞 만리재에 묻었다고 전해 오나 거두지 못하였다. 대정은 본시 의기남아의 고장으로 조선후기 이곳은 민중봉기의 진원지가 되어왔는데, 1801년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그의 아내 丁蘭珠가 유배되어 온 후 딱 백년 만에 일어난 李在守亂은 후세에 암시하는 바가 자못 크다. 1961년 辛丑에 향민들이 정성을 모아 濟州大靜郡三義士碑를 대정고을 홍살문 거리에 세웠던 것이 도로 확장 등 사정으로 옮겨 다니며 마모되고 초라하여 이제 여기 대정고을 청년들이 새 단장으로 비를 세워 후세에 기리고자 한다.

의로운 사람들의 향기인양 정월의 고된 추위 속에서 고운 매화 피었다. 이 매화 향기는 이재수에게 바치고 수선화 향기는 추사 앞에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