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성덕관음길 453 관음사

곡성 관음사는 전라남도 성덕산 서쪽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데, 백제 분서왕 3년인 300년에 성덕보살이 세운 절이다. 백제 때 성덕보살이 지금의 보성 벌교인 낙안포에서 금동관세음보살상을 모셔와 절을 짓고 이름을 ‘관음사’라 부른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려 공민왕 23년 1374년에 원통전을 중수하는 등 5차에 걸친 중건이 있었고, 조선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는 원통전을 제외하고 모두 전소되었다가 선조 37년 1604년에 이르러 모든 건물을 복원하였다. 근세에 와서는 1912년 영담화상이 모든 가람을 고쳐 세웠으나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불타버렸다. 이 때 국보로 지정되어 있던 원통전과 금동관음보살마저 소실되었다. 지금의 원통전은 당시에 화마를 피한 대은암의 자재를 이용하여 다른 자리로 옮겨 새로 지은 전각이다. 2013년 원통전터 발굴조사에서는 고려시대 동종과 광명대가 발굴되었다.

성덕산 관음사는 관음 신앙의 본거지로서 심청 설화의 원형이 담긴 연기 설화로 유명하다.
조선 영조 5년 1729년 백매자白梅子가 기록한 『옥과현 성덕산 관음사 사적』에는 관음사 창건 유래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余少時遊歷諸山, 幸到觀音寺, 初聞長老之說聖蹟曰 忠清道大興縣有一盲人, 其姓元, 其名良, 早喪配偶, 鰥居窮困, 仍鮮族黨, 無所依賴, 惟有一女, 名洪莊, 生而淑美, 態度不凡, 性識通敏, 常以至誠勤養其盲父也. 志切反哺, 跬步不忘, 非特晨昏臥起左枝右梧而侍側, 亦衣服之需, 飲食之味, 無不稱旨. 一境咸稱其大孝, 名聞華夏焉. 其盲父適有故, 出鄉邑, 路逢一僧, 乃弘法寺法堂干善稱名性空者也. 忽見盲者, 趨拜曰:“欲與君同成金剛不朽之因, 幸公為我大施也.” 盲者言:“以我貧丐, 求若所欲, 豈不難哉. ”化士再拜而起曰:“吾受勸軸之日, 夢有金人, 謂吾曰:‘明朝出路口, 必逢盲人, 即為汝之大檀越也. ’是以懇請.” 盲人籌思移時而言曰:家無斗儲, 野無尺壤, 雖欲奚為. 止有一少女, 以此與之. 即賣而以為法堂經營之資.” 是時女年二八. 化士欣然告別, 非但女與父痛悼不已, 山川變色, 日月無光, 禽獸亦哀號, 道路觀聽者, 無不痛楚於衷焉. 女跋涉道途, 心力疲困, 乃憩於蘇浪浦岸, 抬頭西望, 須臾碧海上兩紅船自西而東, 疾如飛箭, 來泊津頭, 是乃中州涓人之舡. 舡上金冠玉佩繡衣使者, 熟視此女之韶顔絕色, 即起拜謝於前曰:“真是后也. ”女變色曰:“是何言歟?”使者曰:“吾晉國人也, 永康丁亥五月辛酉, 皇后崩. 自是上常惻然不已. 一夜夢有神人白上:‘新皇后生於東國, 今已長成, 端正勝於前皇后, 更勿為逝者而哀也.’ 上欠伸而覺. 明日即備幣帛四萬端, 金銀珍寶, 都載兩舡. 又擇善相慧利者為使者. 申命直馳東國, 持此物色, 依樣求得. 小臣猥荷此任, 受命以來, 夙夜憂懼. 今幸睹威儀, 乃敢發言. ”女歎曰:“塤篪相應, 一身之去留, 何難之有. 蓋所持幣帛幾何?”使者答言:“滿載兩船珍寶. ”女微哂而言曰:“我身非我身, 乃父種善之奇貨, 兩舡都付化士. ”遂與計偕入上國. 朝謁之時, 月貌星眸, 光彩照人. 上視而歎曰:“以海隅之鰈域而有如是之人哉!”由是有寵, 所言皆從焉. 后稟性雅善, 彌天慈威. 欲行淨業, 乃敕石匠, 以瑪瑙造塔三千, 分列諸國後. 后曰:“身雖登於寶位, 豈能忘乎本國. ”又敕成五十三佛、五百聖衆與十六羅漢. 點畢, 使舟人載三石船送本國. 浮海中流, 不施篙櫓, 風帆浪楫, 任其所之, 幸泊甘露寺前浦, 因安於此寺還了. 石匠雖老, 志願弘深, 使其子, 又造塔, 移置金剛寺, 四度塔則運立於豐德縣擎天寺, 后又素願成就慕父曰:“爹之福田, 吾何獨無表?”精造佛與塔, 移安於大興縣弘法寺. 如是往復五度, 功德圓滿, 志願已畢. 然所欠者, 自願佛也. 即掃別宮, 倩工鑄成觀音一尊, 令權人載石船, 送東國. 臨行, 后申命曰:“此像則隨所止處而奉安也. ”權人受命向東國, 漂流海中, 已及期矣. 一朝忽隨漂泊於樂安地斷橋側, 無何, 此土邊守疑是荒唐船也, 追捕甚急之. 會此石船無風自動, 入於渺茫中. 翌日, 玉果處女, 稱名聖德氏, 無端自出海上, 獨立望遠, 天海雲波縹緲中, 一葉小石船, 如有引物而來前. 聖德奉覲船上, 金相觀音, 忽發敬心, 投體拜畢, 親負觀音, 輕如鴻毛, 行到此嶺, 重若泰山, 一步不移, 即休安置, 仍建大伽藍, 扁其額曰:“聖德山觀音寺”, 良有以也. 蓋弘莊與聖德, 俱是觀音隨應之身歟?豈特牟尼分身, 百億於塵剎耶! 當時化士性空, 得其財, 不逾月斷功. 盲人元良, 從前別女之哀淚, 盲眼忽明, 俱享休福而終, 壽九十五. 此皆聖感冥應之蹟, 不可以泯沒者也. 余所聞于長老者, 止此而已. 至若峰巒四圍之逶邐, 溪壑一帶之清冽, 人煙之敻絕, 洞府之幽闃, 來者目之, 可略也. 時雍正己酉暮春, 碧梧門人白梅子, 因優閑子之所述, 芟繁增刪而書之. 復記前後重創之蹟, 附之卷尾.
내가 젊어서 여러 산을 유람하다가 운이 좋게도 관음사에 이르러, 장로가 이 절의 성스러운 사적에 대해 설하는 것을 처음 들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충청도 대흥현에 한 소경이 있으니 그 성은 원이요 이름은 량良이다. 일찍이 배필을 잃고 홀로 가난하게 살며 친족도 적어 의지할 곳이 없었는데, 오직 딸 하나가 있어 이름을 홍장洪莊이라 하였다. 홍장은 나면서부터 맑고 아름다우며 태도가 비범하고 성품과 식견이 통달하고 민첩하여, 항상 지극한 정성으로 그 눈먼 아버지를 부지런히 봉양하였다. 뜻이 반포에 간절하여 잠시도 잊지 않았으니, 비단 아침저녁으로 눕고 일어날 때 곁에서 부축하여 모실 뿐만 아니라, 의복의 소용과 음식의 맛에 이르기까지 뜻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 온 경내에서 모두 그 큰 효도를 일컬으니 이름이 중국에까지 들렸다.
그 눈먼 아버지가 마침 연고가 있어 고을 밖으로 나갔다가 길에서 한 승려를 만났으니, 곧 홍법사 법당 권선 승려인 성공性空이었다. 갑자기 소경을 보고는 달려와 절하며 말하기를, “그대와 함께 금강불후의 인연을 이루고자 하니, 다행히 공께서 나를 위해 크게 베풀어 주십시오.” 하였다. 소경이 말하기를, “나같이 가난한 거지가 그대가 구하는 바를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하니, 화주승이 다시 절하며 일어나 말하기를, “내가 권선문을 쓰던 날 꿈에 금인金人이 있어 나에게 이르기를, ‘내일 아침 길목에 나가면 반드시 소경을 만날 것이니 곧 너의 큰 단월이 될 것이다’ 하였기에 이로써 간절히 청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소경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집에는 한 말의 저축도 없고 들판에는 한 자의 땅도 없으니 비록 하고자 한들 무엇을 하겠는가. 오직 소녀 하나가 있으니 이 아이를 주겠노라. 곧 팔아서 법당 경영의 밑천으로 삼으라.” 하였다.
이때 딸의 나이 16세였다. 화주승이 흔쾌히 고하며 작별하니, 비단 딸과 아버지가 통곡하며 마지않을 뿐 아니라 산천의 색이 변하고 해와 달이 빛을 잃으며 짐승 또한 슬피 울어, 길에서 보고 듣는 자 중에 마음속으로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딸이 먼 길을 걸어 심력이 피곤해져 곧 소랑포 언덕에서 쉬며 머리를 들어 서쪽을 바라보는데, 잠깐 사이에 푸른 바다 위로 두 척의 붉은 배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화살처럼 빠르게 와서 나루터에 정박하니, 이는 곧 중국 사신의 배였다.
배 위의 금관옥패를 한 수놓은 옷의 사신이 이 여자의 고운 얼굴과 절색을 자세히 보고는 즉시 일어나 앞에서 절하며 말하기를, “진실로 황후이십니다.” 하였다. 여자가 안색을 바꾸며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우리는 진나라 사람입니다. 영강 정해년 5월 신유일에 황후께서 붕어하셨습니다. 이때부터 황제께서 항상 슬퍼하여 마지않으시더니, 어느 날 밤 꿈에 신인이 황제께 고하기를, ‘새 황후가 동국에서 났는데 이제 이미 장성하였고 단정함이 전 황후보다 나으니 다시는 죽은 자를 위해 슬퍼하지 마소서’ 하였습니다. 황제께서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 다음 날 즉시 비단 4만 단과 금은보화를 두 배에 가득 실었습니다. 또 관상을 잘 보고 슬기로운 자를 택하여 사신으로 삼고 명하여 곧장 동국으로 달려가 이 물색을 찾아 모양에 따라 얻게 하셨습니다. 소신이 외람되게 이 임무를 맡아 명을 받은 이래로 밤낮으로 두려워하였는데, 이제 다행히 위엄 있는 거동을 뵈었기에 감히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여자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악기 소리가 서로 응함 같으니, 한 몸의 가고 머묾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대개 가져온 비단은 얼마나 됩니까?” 하였다. 사신이 대답하기를, “두 배에 보물을 가득 실었습니다.” 하니, 여자가 미소 지으며 말하기를,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라 곧 아버지가 선을 심기 위한 기이한 보화奇貨이니, 두 배를 모두 화주승에게 주라.” 하였다. 드디어 사신과 함께 중국으로 들어갔다.
조정에 나아가 뵐 때 달 같은 얼굴과 별 같은 눈동자의 광채가 사람을 비추니, 황제께서 보시고 감탄하며 이르기를, “바다 모퉁이 넙치 같은 나라(동국)에 어찌 이와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총애를 얻으니 말하는 바를 모두 따랐다. 황후는 품성이 아담하고 착하며 자비와 위엄이 하늘에 가득하였다. 정업淨業을 행하고자 하여 이에 석공에게 칙명을 내려 마노로 탑 3,000개를 만들어 제국의 뒤에 나누어 벌여 세우게 하였다. 황후가 말하기를, “몸이 비록 보배로운 자리에 올랐으나 어찌 본국을 잊겠는가.” 하고 또 칙명을 내려 53불과 500성중, 16나한을 조성하게 하였다. 점안을 마치자 뱃사람을 시켜 세 척의 돌배에 실어 본국으로 보냈다. 바다 가운데 흘러가매 노를 젓지 않아도 바람과 물결을 따라 가는 대로 맡겨 두었더니, 다행히 감로사 앞 포구에 머물러 이 절에 안치함으로써 마쳤다.
석공이 비록 늙었으나 원력이 넓고 깊어 그 아들로 하여금 또 탑을 만들게 하여 금강사에 옮겨 세우고, 4도 탑은 풍덕현 경천사에 운반하여 세웠다. 황후가 또 평소의 원을 성취하고 아버지를 사모하여 이르기를, “아버지의 복전에 어찌 나 홀로 나타냄이 없겠는가.” 하고 정교하게 불상과 탑을 만들어 대흥현 홍법사에 옮겨 안치하였다. 이와 같이 다섯 차례 왕복하여 공덕이 원만해지고 서원이 이미 끝났다.
그러나 부족한 것은 스스로 발원한 불상이었다. 즉시 별궁을 청소하고 장인을 불러 관음상 한 존을 주조하게 하여 권능 있는 사람에게 시켜 돌배에 실어 동국으로 보냈다. 떠날 즈음 황후가 거듭 명하기를, “이 상은 곧 머무는 곳에 따라 봉안하라.” 하였다. 사람이 명을 받고 동국을 향해 바다 가운데 표류한 지 이미 기한에 미쳤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낙안 땅 단교 옆에 표착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이 땅의 수비병이 허무맹랑한 배라고 의심하여 추격함이 매우 급하였다. 이때 돌배가 바람도 없이 스스로 움직여 아득한 가운데로 들어갔다.
다음 날 옥과에 사는 성덕聖德이라 이름하는 처녀가 까닭 없이 스스로 바닷가에 나갔다가 홀로 서서 멀리 바라보는데, 하늘과 바다 구름 물결이 아득한 가운데 한 잎 작은 돌배가 마치 이끄는 것이 있는 듯 앞으로 왔다. 성덕이 배 위의 금색 관음상을 뵙고 갑자기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 몸을 던져 절하기를 마친 뒤, 직접 관음상을 업으니 기러기 털처럼 가벼웠다. 이 고개에 이르자 태산처럼 무거워져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므로 즉시 쉬며 안치하고, 이어 큰 가람을 세워 그 액자를 ‘성덕산 관음사’라 하였으니 참으로 까닭이 있는 것이다. 대개 홍장과 성덕은 모두 관음이 응함에 따라 나타난 몸이 아니겠는가? 어찌 석가모니만이 티끌 같은 세상에 백억 분신으로 나타나겠는가!
당시 화주승 성공은 그 재물을 얻어 한 달이 못 되어 공사를 마쳤다. 눈먼 사람 원량은 예전에 딸과 이별할 때 흘린 슬픈 눈물로 인해 먼 눈이 갑자기 밝아졌으며, 함께 아름다운 복을 누리다 마쳤으니 나이가 95세였다. 이것은 모두 성스러운 감응과 보이지 않는 응답의 자취이니 인멸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장로에게 들은 것은 이뿐이다. 사방을 둘러싼 봉우리의 구불구불함과 시내와 골짜기 일대의 맑음, 인가가 멀리 끊어지고 동천이 그윽하고 고요함은 오는 자가 눈으로 볼 것이니 대략 줄인다. 때는 옹정 기유년(1729년) 늦봄, 벽오 문인 백매자가 우한자의 서술로 인하여 번잡한 것을 깎고 보태어 이를 쓴다. 다시 앞뒤로 중창한 자취를 기록하여 권말에 붙인다.
이 연기 설화가 1930년대 김태준의 『조선소설사』에 소개된 이래로 학계에서는 관음사 연기 설화를 심청전의 원형 설화, 근원 설화, 배경 설화로 인정하고 있다.

산도 성덕이요, 산기슭 관음사의 창건주도 성덕이다.

비단물결 일렁이는 금랑각을 건너면 연꽃 대좌에 앉은 관음사로 들어서게 된다.

관음사 극락전, 대웅전, 원통전

원통전과 어람관음상

곡성 원통전은 관세음보살과 성덕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원통전 본존불인 관세음보살

관음사 성덕보살

곡성 관음사 창건주 성덕聖德은 백제 분서왕 3년 301년에 지금의 보성 벌교인 낙안포에서 금동관세음보살상을 이곳에 옮겨와 절을 짓고 관음사라 하였다. 1374년에 절을 크게 확장할 때 중건된 원통전은 이후에 임진왜란의 화마도 피해갔으나 한국전쟁 당시에 국보 제 273호 원통전, 국보 제 274호 금동 관세음보살상이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그런데 한국전쟁 당시 전소된 원통전에는 성덕보살상의 머리가 소실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성덕보살상의 머리부분은 관음사에 금불상의 머리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얼마 후 도난당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흘러 어느 날 부산에 사는 최보살이라는 불자가 병을 낫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던 중에 꿈을 꾸었는데,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나와 자신이 곡성 성덕산의 관세음인데 자신의 머리가 광주의 고물상에 있으니 찾아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최 보살은 그 길로 광주로 가서 수소문을 한 끝에 한 고물상에서 성덕보살이라 불리는 두상을 찾아올 수 있었다. 이후 최 보살은 다시 관음사에서 나온 흰 불두화, 흰 만리향화, 흰 진달래를 달여 먹으면 병이 나으리라는 꿈을 꾸어 그대로 하니 병이 낫는 가피를 입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곡성 관음사 원통전에는 성덕보살의 가피를 입기위하여 많은 불제자들이 참배한다.

곡성 관음사 원통전 앞의 석조 어람관음상. 어람보살은 물고기 바구니를 든 보살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보기가 매우 드물다. 대구 동화사 금당의 아미타설법도(1887)에 그려진 어람을 든 백의관음보살, 양산 신흥사 대광전의 관음삼존벽화(17세기 후반)에 그려진 어람보살도,적외선 촬영으로 확인된 불국사 어람보살도(1767년 4월부터 6월 사이) 등의 벽화와 이 곡성 관음사 석조 어람관음상이 거의 유일하다.

가슴 앞쪽으로 물고기 머리가 나와 있고 뒤쪽으로는 물고기 꼬리가 보인다.

어람관세음보살은 중생의 어리석음을 낚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관세음보살의 또다른 화현이라고 알려져 있다.

세상사가 달빛에 젖으면 신화가 되고 햇살 아래 드러나면 역사가 된다고 하였던가. 과학이 인정하는 물증만을 역사라고 하기에는 세상은 무척 크고 담화는 참으로 거대하다.

곡성 관음사 대웅전과 극락전이 너른 평지에 함께 조성되어 있다. 관음사 대웅전은 2024년 낙성된 건물로서 건축면적 101㎡(30.5평)에 내9포 외7포로 전면 3칸의 팔작지붕의 전통양식이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 지장, 관음보살 삼존불과 후불탱화, 104위의 신중탱화가 모셔져 있다. 관음사 극락전은 전면 3칸, 측면 3칸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관음사 대웅전 안에 모셔진 관세음보살

관음사 극락전 안에 모셔진 아미타불

두 손 모은 그 뜻
알 수 없으나
한량없는 지혜의 빛
온 허공을 비추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