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북 부안군 진서면 내소사로 243, 능가산 내소사

오늘은 음력 정월 14일이라서 내소사 석포리 당산제가 열리는 날이다. 정월대보름에 즈음하여 부안 일대에서는 16군데에서나 당산제가 열리는데, 그중에서도 내소사 석포리 당산제는 사찰과 마을 당산에서 함께 제를 지내는 유일한 당산제로서 정월대보름 하루 전인 음력 정월 14일에 거행된다. 사진은 내소사 일주문 밖의 할아버지 당산에 제를 올리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이다.

내소사 석포리 당산제 안내문

이 아름다운 내소사길로 당산할머니가 내려와 당산할아버지에게로 간다. 내소사 경내에 있는 할머니당산에 스님들이 제물을 차리고 제를 올린 이후에, 일주문 밖으로 걸어내려와 마을 경계에 있는 할아버지당산에서 마을사람들과 함께 당산제를 합하는 것이다.

내소사에서 먼저 할머니당산에 제를 지낸 스님들이 마을 경계 당산으로 이동하고 있다.
내소사 석포리 당산제의 역사는 문헌상 명확히 정립된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 역사를 가늠하기가 사실상 불가능 하지만, 신목으로 모시고 있는 느티나무의 수령이 각각 1,000여년과 700여년이 되었기 때문에 고려시대 즈음해서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설과, 조선시대 민속신앙이 기층민들의 생활 깊숙이 전파 되었을 때부터 시작 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내소사 석포리 당산제의 원형은 민간주도에 의해서 전승되어진 것이 아닌, 내소사의 주도하에 오래토록 전승되어 왔으며, 불교신앙과 민간신앙의 결합에 의한 복합신앙의 형태를 띠고 있다. 원형적인 부분에서 기존의 당산제와는 그 형식과 의식이 다소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제례의식과 굿의 형태는 불교적인 의식을 따랐다.

백제 무왕34년 633년에 창건된 내소사의 원래 이름은 소래사로 혜구두타 스님이 처음 지었다. 건립 당시에는 2개의 절인 대소래사, 소소래사가 있었으나 대소래사는 소실되었고 소소래사만 남아 지금의 내소사가 되었다. 명칭이 바뀐 까닭은 확실하지 않으며 단지 그 시기만 임진왜란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조선 시대인 인조 11년 1633년과 고종 6년 1869년에 고쳐 지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대웅보전, 설선당과 요사, 보종각, 1823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한 봉래루가 있다. 특히 대웅보전은 인조 11년 1633년에 청민대사가 지은 건물로 건축양식이 정교하며, 문을 장식하고 있는 꽃살은 우리나라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힌다. 이 밖에도 내소사에서 눈여겨볼만한 문화재로는 고려 시대에 제작된 동종과 백지묵서묘법연화경, 삼층석탑 등이 있다.

능가산 내소사 전경

내소사 할머니 당산

매화가 오기 전에 소원꽃등이 먼저 피었다.

부안 내소사 동종은 고려 고종 9년 1222년에 제작된 것으로, 원래 내변산의 청림사에 있던 것을 조선 철종 1년 1850년에 이곳으로 옮겨 왔다. 이 종은 주로 절에서 시간을 알리거나 의식을 치를 때 사용한다. 종을 매다는 고리는 한 마리 용 형태로 제작했고, 종의 몸체 상단과 하단에는 당초문이 둘러 있다. 종을 치는 자리인 당좌撞座에는 연꽃무늬를 새겼고, 종의 가운데에는 좌상의 여래와 보살이 구성된 삼존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가운데 본존불은 연꽃 위에 앉은 모습이며, 좌우의 협시불은 합장을 하고 서 있는 모습이다. 종에 새겨진 장식과 문양이 정교하고 사실적이어서 고려 후기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극락보전.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이다. 원래 내소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은 건륭 13년 1748년 대웅보전에 봉안하기 위해 조각승 태원, 진열, 상정 등 10인의 조각승이 참여하여 새롭게 조성한 것인데 현재는 극락보전에 봉안되어 있다. 내소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은 최초 조성된 조상기와 근대에 후보된 사실을 기록한 보결문이 함께 전해진다는 점에서 불상의 전래과정을 알 수 있는 귀한 유산으로 평가된다.

조사당은 6평의 목조한와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로 내소사에 주석하셨던 조사 스님들을 봉안한 전각이다.

조사당의 조사스님 이외에도 내소사에는 해안대종사, 우암대선사 등이 주석하여 법의 향기를 이었다.

내소사 3층석탑과 대웅보전. 내소사 3층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렸는데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의 양식을 보여주며 가늘고 규모가 작은 고려시대의 양식도 포함하고 있다.

내소사 대웅보전.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은 국가유산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전각이다. 정면 3칸·측면 3칸으로, 다포 양식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건물의 앞쪽에 달린 문살은 꽃무늬로 조각하였다. 현재의 대웅보전은 인조 11년인 1633년에 청민대사가 절을 고치면서 지은 것으로, 호랑이가 변신한 대호선사가 지었고, 단청은 관세음보살이 오색찬란한 새의 모습을 하고 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웅보전 천장의 화려한 장식과 꽃무늬로 조각한 앞쪽 문살은 당시 목수들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엿보게 한다.

대웅보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다.

내소사 대웅보전의 정면창호는 2짝-4짝-2짝 구성으로 안정감을 추구하며, 창호에는 해바라기꽃, 연꽃, 국화꽃 등의 꽃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그 새긴 모양이 문마다 다르고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전설에 의하면 호랑이가 변신한 대호선사가 새긴 것이다.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봉안하고,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 내소사 대웅보전은 호랑이가 목수로 변신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청민선사가 이 내소사의 주지로 있을 때, 대웅보전을 짓기 위해 한 목수가 찾아왔는데, 이 목수는 건물을 짓기 시작하자마자 망치질은커녕 3년 동안 오직 나무토막을 깎는 데만 열중했다. 사람들은 그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며 비웃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만 깎았다. 그러던 어느날, 절은 짓지 않고 나무토막만 깎는 목수에게 불만을 품은 동자승이 목수가 깎아놓은 나무 토막 하나를 몰래 감추어 버렸다. 마침내 목수가 대웅보전을 지었는데 나무토막 하나가 부족한 것을 알고는 크게 낙담했다. 그리고 목수는 청민스님께 "나무토막 하나가 부족합니다. 아직 저의 경계가 미흡한가 봅니다. 떠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청민스님은 "나무토막이 어찌 그대의 경계이겠는가."라며 목수를 돌려세우고 대웅보전을 완성하였다. 대웅보전을 완성하고 절 밖으로 나간 목수는 호랑이로 변하여 산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지금도 내소사 대웅보전 천장 오른쪽 부근에는 나무 토막 하나가 빠져 있는 공간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나무토막 하나가 없어도 대웅보전은 여전히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또 대웅보전 단청은 관음조가 그렸다고 한다. 청민선사는 대웅보전이 완성된 이후에 단청불사를 시작하면서 아무도 법당 안을 들여다봐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또 그 사미승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법당 안을 들여다봤더니, 화공은 없는데 오색 영롱한 작은 새가 입에 붓을 물고 날개에 물감을 묻혀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사미승의 인기척을 느낀 새는 날아가 버리고 내소사 단청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내소사 대웅보전 상단 뒤쪽 벽에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백의관음보살상이 조성되어 있다. 이 백의관음보살상은 개암사 영산회쾌불탱을 제작한 의겸스님 혹은 그의 제자들이 조성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단의 기둥을 뒤로 물려 넓은 내부공간을 확보하고 상부의 포작들은 연꽃봉오리로 조각하고, 천장에도 가득히 장식을 한 다음에 백의관세음보살을 조성했다. 백색의 천의天衣는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관세음보살의 특징을 잘 잡아내고 있다.
이 백의관음보살의 눈을 보면서 좌우로 왔다갔다 할 때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자신을 따라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지장전

지장전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그리움이 닿는 모든 이에게 활짝 열려있다.

설선당

설선당에 걸린 오래된 내소사 현판. 현판의 크기는 소박하나 글씨는 우렁차다.

설선당은 조선 인조 18년 1640년에 내소사를 중건할 때 같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건물의 지붕선이 뒤쪽에 보이는 산세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전각이다. 건물은 보기드문 □자형을 하고 있으며, 지면의 높이 차를 이용하여 건물의 일부를 2층으로 구성하였는데, 현재는 내소사의 대중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다.

아름다운 내소사. 여러 전설이 전해내려오는 것으로 보아 수많은 사람들이 인연을 맺고 사랑했던 사찰이었음이 분명하다. 내소사 산수유도 떠난 이의 길을 비추는 영가등처럼 활짝 피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