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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와 350

어우눌 어우눌을 찾으려 했습니다. 몇 번이나 지도를 확인하며 수차례 마을의 흔적을 찾았지만 그러나 어우눌은 없었습니다. 어우눌 대신 조설대를 찾았습니다. 저 비석 바로 아래쪽에 어우눌에 살던 이응호 선생 등이 조선의 국치를 설욕하리라며 새겨넣은 조설대가 있습니다. 조설대(朝雪臺) 원래 이곳은 조선시대 국상이 있을 때 선비들이 임금이 있는 곳을 향해 향을 피우고 제를 올리던 곳이었는데 이응호 등이 집의계를 조직하고 모임을 가진 이후 조설대로 불려져 왔습니다. 그러다가 귤암 이기온 선생 유허지에 있던 문연사가 도로 확장으로 갈 곳이 없게 되자 이곳으로 옮겨와 오늘에 이릅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글을 음각한 '귤암' 바위 귤암 이기온은 제주에 유배왔던 최익현 밑에서 수학하였는데 그 이기온의 문하생들이 집의계 인사들.. 2008. 2. 29.
죽성 절새미 산수국이 돌아왔습니다. 산수국을 따라 숨은 길을 찾아나섭니다. 제주시 아라동 죽성마을 지금은 행정구역상 아라동에 편입되었지만 과거에는 오등동의 중심 마을이었던 곳입니다. 대나무가 많아 어느때부터인가 죽성으로 불리던 이곳. 그러나 4.3사건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 1대대가 주둔하게 되면서 죽성을 비롯한 인근 마을에는 가혹한 토벌이 시작되었고 죽성은 끝내 아주 사라진 마을이 되었습니다. 이 죽성 마을의 절새미로 가는 길입니다. 제주대학교 소나무 교차로에서 오등동 방향으로 달리다가 SK주유소 가기 직전 맞은편으로 보면 노아의 방주 교회로 올라가는 표지판이 보입니다. 이 길을 200여 미터 가면 다시 왼쪽으로 조그만 과수원길이 나타나는데 이 길의 끝이 절새미입니다. 길 끝 절새미당. 절새미가 설새미라고도 불리.. 2008. 2. 29.
현의합장묘의 정월의 신부 어느 때부터인가 꽃을 꺾지 않게 되었다. 똑 하고 꽃의 목을 꺾는내 손의 무정함에 스스로 질려서였다. 또다른 이유로 꽃을 꺾지 못하는 사람...1948년 정월의 아리따웠던 신부 마을을 불태우며 돌아다니던 토벌대에게 1948년 그해 정월의 신부는 신랑을 잃었다. 그리고 산속에 숨어 옹달샘을 떠 먹고 울음을 집어 삼킬 때 총알을 피해 돌아누웠던 그 뱃속의 아기가 올해 59세. 무정한 세월이었다. 남원읍 의귀초등학교 이곳이었다. 1948년 4.3 당시 국방경비대 2연대 1대대 2중대 군인들이 주둔하여 남원읍 일대 의귀, 한남, 수망 등 중산간 주민들을 토벌하던 전초기지. 48년 11월 7일 다른 마을보다 일찍 시작된 토벌작전에서 끝내 의귀리 300명, 수망리 100명, 한남리 100여명 등의 사람이 희생되었다.. 2008. 2. 29.
영남마을 한원스님 한원 스님 이야기 잃었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큰 이야기 꽃방석 펴놓고함께 듣습니다. 서귀포시 영남동 1948년 11월 28일 국방경비대에 의해 전소되어 사라진 마을 천백도로와 제2산록도로가 만나는 교차점에서 제2 산록도로를 따라 서귀포 방면으로 달리다가 아르도 서귀포 펜션 신축공사현장이라 써 있는 표지판을 따라 오른편으로 난 시멘트 길을 200여 미터 달리면 눈 앞에 환하게 펼쳐지는 영남 마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제주 4.3이 끝나고 난 후 홀로 이 고요한 마을을 지키던 전씨 할아버지가 최근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하시고 나서 요즘 이 영남마을의 아침과 저녁을 매일 마주하는 이들은 전씨 할아버지 막내아들 내외와 4년전 이곳에 터를 마련하신 무주선원의 한원 스님이 전부입니다. 한원스님은 말씀하십니다... 2008. 2. 29.
종낭밭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기도 하지만 가없이 슬프기도 한 일입니다. 그런 인연의 일... 하지만 모진 인연 속에도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행복은 모두 그대 드리고 슬픔은 모두 제가 갖고 싶습니다. 조천읍 와산리 지금은 잃어버린 마을 종낭밭으로 가는 길 와산리 본동에서 선인동 방향으로 꺾은 후 200여미터를 달리면 길 오른 편 축사 옆으로조그만 시멘트 길이 나오는데 이 길을 끝까지 달리면 밀양 박씨 가족 묘원이 나옵니다. 묘원 뒷쪽 삼나무 숲 속이 잃어버린 마을 종낭 마을 일대입니다. 이곳은 1948년 11월 20일 국방경비대 제9연대에 의해 소각된 이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당시의 마을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입니다. 12가호에 60여명이 모여 살던 마을 입구에는 아낙들이 두레박을 .. 2008. 2. 29.
낙선동 4.3 성터 4월입니다. 가시나무에도 꽃이 피는4월입니다. 상처 위에 이제는 꽃이 피어야할 4월입니다. 선흘리 2734번지 낙선동 성터 1948년 11월 20일 토벌대에 의해 선흘리가 초토화된 후 해안으로 소개되었던 마을 주민들이 올라와 이 성을 쌓은 것은 1949년 봄날의 일이었습니다. 원래 마을이 있던 곳으로는 돌아가지 못하고 알선흘이라 불리던 이곳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됩니다. 토벌대는 해안으로 소개되었던 마을 주민들이 마을 재건을 위해 다시 돌아온 이후에도 무장대와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재건하는 마을마다 이와 같은 성을 쌓도록 합니다. 1949년 봄 한달 동안 살아남은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등짐을 져서 돌을 날랐습니다. 성밖으로는 2미터 너비의 도랑을 파서 가시를 묻고 토벌대의.. 2008. 2.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