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와 350 노근리 평화공원 충북 영동 노근리 양민 학살 현장 3박 4일 이어진 미군 양민 학살 현장 1950년 7월 25일에서 7월 29일 그 5일 동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6.25 발발 6일후 참전한 미군은 전쟁 초기에 전선에서 밀리자 이곳 영동군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50년 7월 25일 미군은 원활한 전쟁 수행을 위해 영동읍 임계리와 주곡리 및 인근지역 주민 5-6백여명에게 남쪽으로 피난할 것을 유도했다. 미군의 명령으로 7월 25일 야간을 하가리 하천에서 노숙한 피난민들은 미군의 명령으로 7월 26일 정오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하여 국도에서 철로로 이동했다. 그리고 7월 26일 "피난민들은 모두 사냥감이다" 그 사냥 명령에 미군 폭격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3박 4일 더운 여름날 5-6백명.. 2012. 8. 6. 제주 4.3 평화공원 제주 4.3 평화 공원 내의 평화 기념관에서 제민일보 4.3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늦은 오후 절뚝이는 걸음을 옮겼다. 쉽게 접할 수 없는 자료들 앞에서 걸개처럼 늘어진 한 장 한 장 신문의 무게가 천근보다 무거워 보인다. 다랑쉬굴의 진실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사진이다.. 2011. 6. 8. 곤을동 -잃어버린 마을 항상 물이 고여 있어 그 이름도 곤을동이라는 이곳에 지금도 고인 물은 여전하지만 1949년 1월 4일 국방경비대 제2연대 1개 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한 순간에 마을은 사라지고 없다. 별도봉 동쪽 화북천이 바다와 만나면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아름다운 포구에 자리한 곤을동 그곳에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이 있다. 하천 안쪽의 안곤 바닷물이 오가는 저 하천을 사이에 두고 마을은 안곤, 가운데곤, 밧곤으로 나뉘어 살았다. 안곤으로 가는 길에 안내문이 붙어 있다. 고려 충렬왕 26년 별도현에 속해 있었으며 작은 공회당도 가진 제주의 전형적인 바닷가 마을 제주 4.3당시 산으로 숨어든 무장대를 방어한다는 구실로 중산간의 사람과 마을을 학살해 나가던 국방경비대가 왜 이 해안마을을 표적으로 삼았는지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2010. 4. 29. 아픈 길... 슬픈 눈...제주 4.3공원의 그 사람 슬픈 눈 ... 그렇구나 ... 슬픔이란 이렇게 막막하게 아주 막막하게 눈동자에 맺히는구나 죽음의 행렬로 내쫓길 때 한 번 뒤돌아본 그 사람 저승길을 재촉하는 총칼에 대한 원망은 없다. 그러나 불러보고 싶은 이름은 가슴에 있다. 피투성이 고향 산천에 두고 가는 우리 어멍, 우리 아방, 우리 성님.... 그리고 내 새끼들아 제주지역 행방불명 희생자 묘비마저 차갑다 골수에 새긴 아픔을 모아 놓으면 검은 무지개가 될까 부디 눈동자에 새긴 마지막 그리움마저 버리고 버려 극락왕생하소서 그 아픈 길을 이 아이들이 다시 걷지 않게 하소서 봄날은 가고 없다. 어둔 밤에 찾은 4.3평화 공원에는 여전히 칼바람이 불고 있다. 쏘아 죽이고 태워 죽이고 굶겨 죽이던 국군 토벌대의 삼광작전이 행해지던 거친오름 위로 달이 뜬다... 2010. 4. 28. 다시 찾은 낙선동 4.3 성터 제주 4.3 당시 마을 주민들을 격리시키고 통제하기 위해 설치된 전략촌 가운데 그 원형이 잘 보존된 곳 중 하나인 함덕리 낙선동 성터가 복원되었다길래 옛 길을 더듬어 다시 찾아 보았다. 48년 4월 3일 이후 사라지는 사람과 사람의 마을 사이에서 49년 4월 낙선동은 완성되었다. 이제는 길을 아는 원혼들만 찾아와 쉬는 쉼팡 젊은 것들은 모두 죽어나가고 늙은이와 아낙네들만 모여든 낙선동 성터 그 입구에 한라산 토벌을 끝내고 오던 중 옮겨 심었다는 폭낭이 짙푸른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군경 토벌대의 작전으로 선흘리가 불에 타서 없어진 후 함덕리 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선흘 주민들과 조천 관내 주민 등을 수용하기 위해 설촌된 낙선동 정문 초소 주민들의 성밖 출입시 양민증 통행증 등을 검사하던 곳 경찰 초소 함덕.. 2009. 10. 3. 무명천 할머니 월령리 선인장 꽃은 아무도 꺾으려 들지 않는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가시가 돋는 아픔 하나가 이곳에 묻혀 있는 까닭 때문이라고 말하며 너절한 시인 흉내를 내지는 않겠다. 한림읍 월령리 무명천 할머니가 가시밭길보다 더한 그녀의 고단한 일상을 눕혔던 조그만 집. 정낭을 걸어놓고 떠나실 때 차마 두 눈은 감으셨는지 무명천 할머니 할머니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2009년 국가 권력의 폭력이 난무하는 대한민국에서 '아름다워요'라는 단어는 화보를 찍는 한나라당 나00 의원에게나 쓰는 말이고 무명천 할머니 앞에서는 어떤 수식도 깊은 절망일 뿐이다. 1914년에 태어나 1949년 제주 4. 3 당시 사람을 토벌하러 들어온 이승만의 친구들, 그 토벌대의 총에 맞아 턱이 날아가고 그로부터 55년. 평생을 앓던 후.. 2009. 6. 30. 이전 1 2 3 4 5 6 7 8 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