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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와 350

4.3의 길을 따라 성읍에서 표선까지 1948년 4월 3일 발생하여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되기까지 제주 사람 9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간 제주 4.3 제주의 모든 길이 4.3으로 가는 길 아닌 길이 없지만 과거에는 두려워서 끊겼었고 이제는 환금 가치가 없어서 그 길은 끊긴지 오래다. 성읍초등학교 성읍리는 성읍지서에 토벌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무장대로부터 보호 받고 있었으나 1949년 1월 13일 군경 합동 토벌 작전으로 마을을 비운 사이 무장대의 공격으로 전소되었다가 82년 다시 재건된 곳이다. 성읍초등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일주도로변의 효열각 열녀 송씨와 효자 강씨를 추모하는 곳이다. 효열각 옆 애향 용사 순국비 당시 무장대의 공격으로 희생당한 마을 주민들을 추모하여 1961년 성읍리 4-H에서 세운 것이다. 그들과 함께.. 2009. 3. 28.
제주 4.3 평화 공원 1949년 1월 6일 눈쌓인 거친 오름 바람은 칼처럼 매서웠다. 이 땅의 일본군이 떠나고 이 땅에 다시 미군이 들어와도 먹고사는 일이 더 힘들어 산 아래서 무슨 일이 났는지 몰랐는데 그날은 총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총소리가 가까워 왔다. 군경 토벌대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 왔다. 애어미는 겁에 질려 오름을 향해 뛰었다. 두살난 어린 아이를 안고 맨발로 눈길을 미끄러지며 뛴들 얼마나 멀리 도망갈 수 있었으랴. 고요한 겨울 오름 위로 가슴팍을 조준한 총소리는 참 간결도 하다. 탕..... 탕..... 하얀 눈위 얼어버린 핏자국 이명박과 뉴라이트는 참 간결도 하다. 산짐승처럼 공포에 쫓겨 내달리던 제주사람들의 이 핏자국을 그들은 간결하게 '폭도의 것'이라 부른다. 제노사이드.... 유대인 출신 법학자 렘킨은 .. 2008. 5. 11.
문형순... 그리고 모슬포 시간의 길은 과거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역사도 언제나 현재라는 걸 그런데도 왜 잊고만 사는 걸까요. 문형순! 독립투사 출신으로 단신 월남하여 경찰에 투신한 이후 1948년 3월 14일 대정읍 영락리 마을 청년 양은하가 모슬포 경찰서로 끌려와 고문치사 당했을 때 모슬포 경찰서장이었던 그 사람! 그러나 제주 4.3이 발생하자 무고한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돌아서서 경찰의 총구를 막아섰던 사람 그 사람의 비석이 대정읍 하모 3리로 들어서는 일주도로 변 짐개동산에 서 있습니다. 성산포 경찰서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백성에 대한 무자비한 발포 명령에 대해 '부당하므로 불이행'하겠다며 대량학살을 막아냈던 그 사람! 권력만을 따랐다면 4.3의 가해자였을 수도 있었으나 목을 옥죄오던 가책의 끈을 풀고 끝끝내 .. 2008. 3. 5.
불카분낭에서 백화동까지 조천읍 선흘리 보건진료소에서 동쪽으로 난 길로 약 100여미터 들어간 곳에 위치한 불카분낭 '불카분낭'은 불에 타버린 나무라는 뜻입니다. 1948년 제주 4.3사건으로 당시 제주도민의 1/9인 약 3만여명의 백성들이굶어죽고, 총맞아죽고, 불태워져 죽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 군경에 의해 선흘리 마을이 초토화되면서 함께 불타버린 후박나무 shoot everyone to death 미군 비밀 문서에 남아있는 제주 4.3 당시 초토화작전을 이끌었던 제2연대 연대장 함병선의 명령입니다. 남김없이 쏴 죽여라는 명령 이후 마을과 함께 불에 탔던 이 나무에 언제부터인가 새순이 돋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람을 타고 송악이며, 줄기사철 나무들이 화상을 입은 후박나무 곁으로 날아왔습니다. 광란의 시절을 견디어 스스로 .. 2008. 2. 29.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 가족 묘지 동백처럼 빗속에 서 있습니다. 2007년 12월 23일 제주시 회천동 화천사 옆에 세워진 4.3희생자 위령비 산물낭우영, 감낭우영, 드르생이, 소낭굴 회천동 옛 마을과 함께 사라진 1948년 당시의 외로운 영혼들을 추모하며 그렇게 서 있습니다. 화천사 진입 직전 오른쪽으로 꺾어들어간 곳에 산물낭우영 산물낭우영 마을은 1948년 11월 27일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져 사라졌지만 마을로 들어가는 돌담길은 그날 이후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감낭우영 서회천 마을 입구에서 200여미터 남쪽으로 올라가면 세갈래 길이 나오는데 바로 그 왼편 지경이 감낭우영입니다. 1948년 1월 10일 삼양 주둔 군경 토벌대가 급작스럽게 공격해오자 마을 주민들은 산을 향해 달아납니다. 그중 17명의 주민이 저 길에서 총에 맞아 쓰러졌습.. 2008. 2. 29.
리생이 곰궤 59년만이라 합니다. 곰궤를 다시 찾은 건... 해안동 리생이의 곰궤를 찾아가는 길에서 어쩔 수 없는 인연으로 다가오신 홍씨 어르신. 1948년 당시 16세 그러나 그날을 피해가듯 59년 동안 이곳을 피해 다니셨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 산책님들을 위해아직도 피비린내가 날 것만 같다는 그곳으로 발길을 옮겨주신 홍씨 어르신께 감사드리며 산책님들과 함께 걷습니다. 1948년 산간마을 리생이에 풍문 하나가 들려왔습니다. 제주 성에 난리가 났다 그러나 풍문에서 멀리 떨어진 이 해안동 리생이 사람들은 산 속에서 탈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1948년 남한 단독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 정권의 5.10 선거 강행이 다가오면서 인근 도평, 외도 등 해안가 마을 사람들이 이 리생이 남쪽 붉은 덩어리로 피신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2008. 2. 29.